졸라라바트에서 일박을 하고 다시 오쉬를 향해 못 다 간 길을 떠납니다.
오쉬는 실크로드 천산북로 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
언제부턴가 저는 실크로드 천산북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갈증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차가버섯님을 통해 천산산맥을 만난 이후에는 한층 더 그 매력에 빠지게 됐습니다.
먼저 아침을 먹습니다.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만으로도 이곳이 우즈벡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즈벡인들과 키르키즈 민족간의 문화적 차이는 커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라그만’이라고 부르는 중앙아시아의 유명한 국수입니다.
중국에서 면발을 만드는 방식과 같이 반죽한 밀가루를 늘여서 길게 하나의 가락으로 뽑아내는데, 여기에 어떤 소스를 얹느냐에 따라 다양한 국수가 됩니다.
보시는 것은 양고기를 재료로 한 라그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국수지만 아쉽게도 이 집에는 야채 라그만이 없어 따로 시킨 메밀밥.
꿩 대신 닭인 셈이지만 그래도 맛있었습니다.
천산산맥을 넘으면 남쪽은 뷔시켁이나 천산산맥속의 문화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입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의 하나는 이곳이 평원지역이라는 점.
농경문화가 강한 곳이고 그만큼 우즈벡인도 많으며, 회교의 영향도, 우즈벡의 영향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사진에서 보시듯이 여기서는 펼쳐지는 평원마다 농사를 짓습니다. 그러니 한 나라라고 해도 이곳의 문화와 북쪽지역의 문화가 같을 수 없음은 불문가지.
역사적으로도 이곳 남쪽의 평원지역과 유목민족 간에는 잦은 충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제 남쪽 평원지역에 가까워 가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해발 1,000과 2,000미터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는 중.
푸른 초원이 펼쳐지다가도 다시 사막이나 다름없는 산들이 펼쳐지고....
그러다가 다시 오아시스 같은 초원의 마을이 펼쳐지는데...
마을을 둘러 싼 이 산들을 보시면 왜 제가 오아시스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농경의 특성 상 가능하기만 하다면 최대한 농사를 지어보려는 간절한 노력이 저렇게 저 민둥산 경계까지 밭으로 개간하는 안스러운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곳.....
그리고 그 밭들의 끝에는 이렇게 해바라기들이 심어져 있습니다.
해바라기는 밭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불모의 땅에서도 잘 자라서 주민들에게 기름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식물이라는군요.
그리고 또 이렇게 갑작스레 호수가 나타나기도 하고....
이제 천산산맥을 넘어 해발 8백 미터 정도의 오쉬 평원에 부근에 도착합니다.
천산산맥을 넘었다?......
그런데 저 앞에 보시다시피 우리는 아직 천산산맥을 모두 넘은 것은 아닙니다. 비쉬켁으로부터 600km를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천산산맥의 일부를 넘었을 뿐인 겁니다.
저 앞에, 남쪽에 버티고 선 설산들이 천산산맥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저 산맥 동쪽으로는 중국이, 남쪽으로는 타지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이, 서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천산산맥이 페르가나에서 마지막으로 용트림 하고 그 대장정을 끝맺기 직전의 분지이고 우즈벡으로 연결되는 대평원의 시작 지점일 뿐입니다.
드디어 오쉬에 입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쉬에 도착하던 무렵은 작년 오쉬 폭동 일주년이 막 지난 시기. 한국 대사관에서도 여행 자제 권고지역으로 지정했을 만큼 불안한 기운이 감돌던 때였습니다.
스베타도 발로제도 오쉬 행을 반대했지만 그러나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가볼 것인가 하는 생각에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는 했는데...
막상 오쉬에 도착하고 보니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듯 했습니다. 오쉬 입구에 설치 된 저 군인들의 검문소가 그런 상황을 대변해 줍니다.
일촉즉발의 불안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것도,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극도로 조심스러운 상황.
시내 곳곳에는 저렇게 경찰들도 보이구요.
시내 어디에를 가더라도 지난 참상의 상흔은 생생했는데...
이제부터 작년 6월 10일 오쉬 사태의 현장의 일부를 보시게 되겠습니다.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못한 채 방치된 상흔들....
1만 명이 목숨을 잃고, 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10만 명이 우즈벡으로 영구 이주한 대규모의 폭력사태.
그 사태가 이 나라에 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일 년이 지나도록 저렇게 복구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둘 중의 하나라는 군요.
일가족이 몰살되어 복구할 사람이 없거나... 남은 가족이 모두 우즈벡으로 이주했거나....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면 어찌됐든 가진 땅은 처분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가족 우즈벡 이주설은 설득력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남의 사태이기만 한 걸까요.
오쉬사태는 빈부격차의 확대, 문화적 이질감의 상호 존중 부재 그리고 도덕적 부적격자들에 의한 정치 지배라는 삼중의 문제가 일으킨 참사였습니다.
바로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해 보려는 노력 자체마저 배제된 우리들의 삶을 대변하는 겁니다.
생각을 바꿔서, 지금 지구를 축소하고 인구를 비례대로 줄여서, 아프리카와 유럽과 북미와 아시아, 남미의 사람들이 키르키즈스탄이라는 좁은 지역에 함께 거주하도록 한다면, 우리가 목격할 것은 과연 오쉬사태 정도일까요.
저 불타고 허물어진 잔해들이 그런 사태를 겪고도 아직 아무런 치유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키르키즈스탄과, 똑같은 구조적 문제에 부딪혀 어쩔 줄 모르는 지구촌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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