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천산산맥 여행은 비쉬켁에서 오쉬와 송쿨을 거쳐 다시 비쉬켁으로 돌아오는 여정입니다.
비쉬켁에서 오쉬까지는 대략 600km. 천산산맥을 우측으로 비스듬히 횡단해야 하고. 오쉬에서 송쿨을 거쳐 비쉬켁까지는 다시 대략 700km, 다시 천산산맥을 좌측으로 비스듬히 횡단해야 합니다.
천산산맥 1,300km. 그 길의 중간에 탈라스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탈라스 분기점. 직진하면 오쉬, 우회전하면 탈라스)
탈라스는 고선지 장군이 중앙아시아에서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인 곳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한 곳이며, 그 결과 동서 양 문명사에 큰 획을 긋게 된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은 여러 분도 잘 아실 겁니다.
고선지 장군이 쿠차로부터 어떤 루트를 밟아 탈라스로 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 앞에 보이는, 이제부터 가려고 하는 이 길만큼은, 근방에서 탈라스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므로, 그 당시 고선지 장군이 밟고 지나 간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말은 바로 생활입니다)
사라센의 대규모 정예병을 만나고도 언제나 그렇듯이 망설임 없이 적진 속으로 깊숙이 진군하는 고선지장군.
탈라스 평원을 향해 7만의 대군을 몰고 이 험한 고갯길을 넘을 때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상상이나 했을까요.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약관 20세에 장군이 되고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해 안서도호부절도사가 된 사람.
파미르 고원을 정복한 최초이자 마지막 중국장군. 남들이 모두 천시하는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봉상청을 알아보고 후계자로 키운 사람.
실크로드를 호령하며 안록산과 함께 ‘개원의 치’라는 당의 황금시기를 구가하도록 한 주인공의 하나인 고선지장군이 넘은 이 길은 오뜨목패스를 넘어 탈라스 강 유역 평원으로 향합니다.
그 때의 상황을 당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고선지가 안서의 쿠차에서 700여리나 깊숙이 들어가 탈라스의 금라사성에 이르러 대식국과 마주쳤다”
751년 7월의 탈라스. 사라센측 20만 병력과 고선지군 7만 명이 대치했다고 하니 군대는 물론이요 평원의 규모가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탈라스라는 도시는 키르키즈스탄에 있지만, 고선지장군이 일전을 벌인 탈라스 평원은 카자흐스탄의 영토 속에 편입되어 있다고 합니다.
(영하 40도와 영상 40도를 오가는 기온때문인지 이지역의 바위들은 대부분 저렇게 풍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 역사의 현장을 가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합니다. 하지만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를 향해 걸었던 이 길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길 위 어디엔가는 1,400년 전 그 때의, 고선지 장군의 고통과 번민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탈라스로 가는 길의 가장 높은 고개 오뜨목패스. 초여름인데도 몹시 추웠습니다)
7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간 길도 바로 이곳, 그리고 며칠 후 불과 수천의 패잔 병사를 이끌고 돌아 온 길도 바로 이곳. 피를 토할 것 같은 울분과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범벅이 된 채 울고 넘었을 이 길.
고선지가 어려서 고려인 장군 아버지를 따라 변방 안서에 정착하게 되는 것은 당 현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따른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오랑캐를 오랑캐로 막는, 손 안 대고 코풀자는 이 정책의 기발함은 그러나 변방의 장수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이냐 하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태생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그래서 이제는 흉노나 토번이 아니라 변방의 이민족 장군들에 대한 걱정으로 발 뻗고 편히 잠들기 어려운 아슬아슬한 정책이 되겠습니다.
당의 변경을 양분한 안록산과 고선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결국 당 현종의 운명을 결정한 것도 바로 이 장수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유민의 신분으로 당나라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천민이 되거나 변방의 장수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 장군 아버지를 둔 고선지는 변방의 길을 선택했고,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함으로 출세의 길을 달려왔습니다.
(오뜨목패스에 있던 화장실. 저 안의 상황을 설명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공중부양의 능력이 요구되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미 공중부양을 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 되겠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게릴라식 기습작전을 바로 그 유목민들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과감한 발상으로 파미르 고원을 정복하고 실크로드를 지배한 유일한 중국 장수.
정복은커녕 접근조차 어려웠던 중앙아시아의 고원지역을 평정한 놀라운 고선지 장군의 업적들은 한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과감함과 용맹성의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오뜨목패스에서 바라 본 탈라스 방향)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힘의 하나는 바로 고선지가 고구려 유민 출신이라는 데에서 나옵니다.
한족의 질시와 모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승전(勝戰). 만만치 않은 유목민들과의 싸움에서, 그것도 지리와 환경이 생소한 적지에서 벌이는 전투에서의 승전은 죽음을 각오한 부하들의 충성심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
(고갯길을 내려와 해발 2500m 정도에 있던 평원에 펼쳐진 밭)
고선지 장군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부하들의 충성심과 용맹 또한 그에 못지않았는데, 고선지 장군을 죽음으로 따른 정예 부대가 바로 똑같은 처지의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겁니다.
한족들에게 멸시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을 마련해 준 고선지 장군에게 그들이 느꼈을 감사함과 존경심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고선지 장군은 또 그만큼 그들을 아끼고 보호했을 거구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혹한의 파미르를 넘어 중앙아시아 전체를 정복하고, 실크로드의 황제로 불리기까지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준 고구려 유민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은 것은 고선지에 비하면 그야말로 약과였던 것이니, 지금의 군사 전문가들도 한결 같이 고선지 장군의 지략에 감탄하는 바가 바로 그런 점들이라 합니다.
(평원에 있는 마을. 전형적인 천산산맥 마을 모습입니다)
그런데 탈라스에서 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오랜 행군의 여독을 풀 사이도 없이, 미처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받은 기습으로 고선지 진영은 어지러워 졌고, 그 와중에 안서의 여러 속국들로부터 지원받은 부대의 반란이 더해진 최악의 상황.
미리 대기하며 철저히 준비한 사라센의 20만 병력 앞에 고선지의 7만의 병사는 한 순간에 괴멸됩니다.
이 전투는 고선지 장군이 생전에 기록한 첫 패배이자 유일한 패배로 기록됩니다.
(마을에 있던 유치원. 사회주의 복지시설의 잔영. 우리나라 같으면 차타고 삼십 리는 가야 할텐데...)
패배의 아픔보다도, 자신을 어버이보다 더 사랑하며 목숨을 바쳐 따랐던, 가족이나 다름없는 고구려 유민 군사들을 모두 잃은 슬픔이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을 겁니다.
아랍의 역사서는 이 전투에서 5만의 당나라 군사를 죽였으며 2만의 포로를 획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마을 곳곳에 서있는 번호판 없는 자가용들. 모두가 탐냈던 한혈마의 적통들입니다)
중앙아시아를 지금까지 회교국가, 즉 ‘스탄’으로 부르게 한 것도 바로 이 전투이고, 당나라를 실크로드의 지배력을 잃고 점차 쇠퇴해 가는 제국으로 만든 것도 바로 이 전투가 가져다 준 결과이며,
무엇보다도 이 전투에서 잡혀간 2만 명의 포로가 유럽에 미친 영향은 심대했던 것이니.....
(지나가는 길에 이 동네에 살고 있던 차가버섯님 친구 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사고로 돌아가셨다는군요)
바로 이들에 의해 제지술이 아랍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전파되었던 겁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가 붕괴되고 스콜라 철학이 성립되기 시작하는, 문화적 암흑기로 막 진입하던 시기. 그리스로부터 꽃피운 찬란한 인문학과 과학이 쇠퇴하고 잊혀져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문화적 환경에 절망한 학자들이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 때 이들을 가장 환영하고 대우해 준 곳이 바로 신흥 문명권 아랍.
그 결과 유럽 대륙의 첨단 학문과 기술들이 아랍으로 대거 이동하여 보존되게 됩니다.
그런데 학문에 필요한 양피지는 매우 비싸고 다루기도 어려운 재질이어서 국가의 중요 문서나 종교 서적 외의 용도로 이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제 수련 형식을 통해 지식이 보존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뛰어난 스승 밑에 항상 뛰어난 제자가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다가 전염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스승을 잃는 경우도 많아 비싼 댓가를 치르고 모셔온 유럽의 지식을 소화해야 할 아랍의 입장에서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겠구요....
무언가 학술적 기록을 위한 수단이 절실하던 그 때 제지술이 전파가 됐다는 사실은 세계사적으로도 축복과 같은 일이었겠습니다.
13세기 이후 진행된 유럽 문명의 부흥이 아랍에서 간직한 고대 유럽의 지식의 재발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선지 장군으로부터 시작된 제지술 전파의 중요성은 지금의 현대 문명을 결정한 핵심적인 요인의 하나라는 점에서도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겠습니다.
저 길. 바로 저 길이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고선지 장군이 참담한 심정으로 퇴각하던 길일 겁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는 고선지. 그의 일화에는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언젠가 봉상청에게 성을 맡기고 고선지가 출정을 하게 됐는데, 고선지가 떠난 후 성 내에 남아있던 고선지의 양아들이 아버지의 힘을 믿고 말썽을 부렸던가 봅니다. 봉상청은 군법에 따라 고선지의 양아들을 처형했습니다.
고선지의 양아들은 평소 고선지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봉상청이 이를 군법대로 처리한 것도 예사 일이 아니지만....
이 사실을 접한 고선지 장군의 태도도 남다른 데가 있었으니..... 이 소식을 접한 고선지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래, 벌써 처형했다는 말이냐?”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와서 봉상청을 만나고도 이 문제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봉상청을 알아보고 키우고, 한 번 일을 맡긴 이상 두 말이 없었던 고선지.
그런 고선지를 믿고 그의 군사들은 목숨을 바쳐 싸웠을 겁니다. 그리고 탈라스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갈 때에도, 아마도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자부심이었던 고선지 장군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이를 잘 알고 있을 고선지 장군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죽기는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복수를 맹세하지 않았을까요. 이 치욕을 견디며 살아 반드시 억울하게 죽어간 내 부하들의 영혼을 달래주겠노라고... 그러려면 비참해도 살아 견뎌내야 한다고...
그러나 고선지에게 그런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장안으로 송환되어 권한 없는 직책의 나날을 보내다가 안록산의 반란을 막기 위해 전장에 나섰으나 모함으로 억울하게 처형당한 고구려의 후손 고선지.
그가 맞이한 최후는 당당한 것이었습니다. 억울한 모함에도 그는 변명하지 않았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목숨을 보전할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의연하게 처형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동안 살아있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고, 자기를 믿고 싸우다가 숨져간 수많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는 그들의 원한을 갚아줄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에게 삶은, 더 이상의 개인적인 구차한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751년 7월 탈라스의 그 날, 피눈물을 흘리며 고선지 장군이 지나가던 모습을 저 산은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2011년 6월, 저는 저 산 앞을 지나갑니다. 천삼백 년의 시공이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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