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3살 터울 여동생이 있다. 아주 소싯적엔 먹을 것으로, 많이 경쟁하였다. 싸움은 안 하였지만 신경전은 대단하였다. 가령 어머니가 참외를 사 오시면 동생은 무조건 큰 거를 고르고 나는 개수를 얼른 세어보고 제일 작은 것을 고르고 얼른 먹고 또 하나 먹었다. 그때는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은 시절이니까 다른 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쯤 아버지 가계에서(아버지는 셈베(일본말)라고 불리는 생과자 가게를 하셨다)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 그 때는 학생 수가 많아서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가게에 진열 되어있던 콜라를 한 병 달라고 하고 얼른 마시고 빈 병에다 양조간장을 반쯤 넣어 동생이 들어올 무렵 의자에서 뒤돌아 앉아서 콜라를 병째 마시는 척했더니 동생이 확 뺏어서 꿀꺽꿀꺽 마셨다. 나는 배 터지게 웃었고, 어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다. 사실 어머니에겐 동생이 아픈 손가락이었다. 3, 4살쯤 동생은 당시 유행이던 홍역을 앓았는데, 고열에 시달렸고, 두 귀의 청력을 잃었다. 한 참 재잘재잘 대던 나이에 들을 수 없다니 어머니 가슴에 한이 되었으리라 어머니는 동생을 농아 학교에 보내질 않았다. 일반 학교에 넣었다. 지금도 입 모양을 보고 대화를 나눈다. 수화는 전혀 못 한다. 그런 동생이 창피해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에 친구들이 온다고 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못 오게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동생 중학교 졸업식에 가기는 싫었지만, 어머니 모시고 참석했는데 동생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표장을 받았다. 우수상인지 무슨 상, 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교장선생님 말씀은 기억난다. 청각 장애가 있으면서 영어도 잘한다는 것이었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과목 중에 영어를 제일 못한다. 곧이어 동생 짝꿍이 상을 받았다. 선행상이다 3년간 청각 장애인 동생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난 속으로 반성을 많이 했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동생을 창피하게 생각 한 적이 없다. 일부러 내 동생 청각 장애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숨긴 적도 없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카톡을 처음 알려준 사람도 동생이다. 동생 나이도 곧 70이다. 이제 서로 숨길 것도 숨길 이유도 없다. 내게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지금도 회식이라도 하면 동생이 제일 생각 난다. 단지 희망하는 상황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동생아! 건강하게 살아 맛있는 음식 많이 사줄게! |
출처: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1군단 원문보기 글쓴이: 청천고부내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2군단 > 크리에이터 정관진 저작권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아! 어머니 (0) | 2024.06.03 |
---|---|
스크랩 무엇을 먹으면 안 됩니까? (0) | 2024.05.29 |
스크랩 진맥에 대하여 (0) | 2024.05.21 |
스크랩 15년 전쯤 모스크바에 갔다. (0) | 2024.05.20 |
스크랩 한 입 넣고 수저를 내려놓으십시오. (0) | 2024.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