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어머니
난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가장 존경한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누군들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겠는가? 일부 매스컴에서 나오는 비정한 어머니 말고~ 70이 넘어 글을 써보니 좋은 점이 하나 있다. 누가 보든 말든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십수 년 전 카페 블로그를 시작해서 글을 쓸 땐 잘 써보려고 신경 쓰다 보니 내용이 제대로 전달 된 것, 같지 않고 띄어쓰기 맞춤법까지 신경 쓰다 보니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였다. 이제는 남이 보지 않는 일기장에 글을 쓰는 것, 같이 크게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생각을 의식의 흐름대로 써서 좋다. 그래도 조심하는 것은 종교와 정치에 관한 생각과 글이다. 이 두 가지 빼고는 각자의 살아온 삶이니까 일기장에 표현할 수 있는 내 마음이니까 누가 시비를 걸 수도 없을 것이다. 그전에는 생각하는 시간은 짧았고, 글 쓰는 시간은 길었는데 이젠 생각은 깊고 글 쓰는 시간은 단축되었다. 사실 그동안 글을 올리면 시비 거는 사람도 많았다. 원인도 모르는 질병이 무수히 많은데 거기에 내 생각을 가미하였으니, 시빗거리가 왜 없겠는가? 악풀댓글이 두려워 쓰고 확인하고 지우고 시간만 잡아먹고 겨우 올리면 내용이 없고 거기에도 반박이 나오면 재 반박하여야 하고 한도 끝도 없는 암, 건강에 대한 논쟁 지겹기까지 하였다. 살아온 세월 살아갈 세월 모두 틀리기 때문에, 각자 스스로가 가장 훌륭한 의사이다. 라는 것이 가장 내 자신에 맞는 표어이다. 코로나 시국 때문에 70전에 몰랐던 나 자신과 몸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어 보았고 그것은 세상 모든 것, 이 포함된 내 삶이었다. 사람들이 이래서 도를 통한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 들 정도까지다. 난 내 몸의 전조증을 잘 안다. 오랜 시간 건강 관련 글을 올리다 보니 조금만 이상이 온다고 하면 알아차린다. 수년 전엔 중풍 전조증이 왔는데 요로 법으로 고친 적이 있다. 그밖에 다른 것도 알아차리고 고쳤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기가 알아차리고 자기 방법에 맞게 실행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전에 이름도 생소한 난치병이 7,000여 가지 된다고 하였다. 지금은 더 늘었을 것이다. 기후 변화로 앞으론 기하급수적으로 더 늘어 날것이다. 특정 방법 특정 약으로 앞으로 해결할 수 있는 확률은 점점 줄어든다. 각자도생이다. 스스로 자기를 살펴서 미리 예방하는 수밖에~ 사설이 길었지만 이런 생각과 행동을 가지게 한 것도 어머니 영향이다. 어머닌 1919년생으로 3.1운동 기미년생 이시다. 지금 내 나이 때 돌아가셨다. 경주 김씨로 맏딸로 태어나서 외할아버지 귀여움을 흠뻑 받다가 20세에 결혼하셨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기억은 제대로 안 나지만 민화투를 어머니에게 배웠고 새벽까지 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누가 또 엄마가 노름꾼이었나? 댓글 달라 그때는 장난감이고 집에 종이도 귀했다. 어른들이 종이만 보면 담배 말아 피웠다.) 그때의 추억으로 관진고스톱을 만들었다. 밑에 동생 둘이 있는데 동생 둘이 있는데 동생들한테 베푸는 사랑을 행여 내가 시샘이라도 할 것 같으면 알아듣게 타이르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화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 말씀에는 순종 하셨고 자식들에겐 한없이 자애로우셨다. 이미 여동생에 대해선 설명하였지만, 홍역을 제때 제대로 치료 못 해 청각장애인이 된 것을 몹시 자책하셨다. 난 중학교 때부터 30살이 넘도록 밤에 배가 아파 고생하고 키도 더 이상 안 자라고 말랐는데 성인이 되고 알고, 보니 헬리코박터 때문에 위, 십이지장궤양이 온 것을 몰랐다. 어머니가 의원 한의원 다 데리고 다니면서 진찰해도 병명도 모르고 약을 먹으면 그때뿐이었다. 나중에 내시경 찍어보고 알았다. 헬리코박터 약을 1달 먹고 나았는데 위생에 힘써서인지 그 병으로 아프진 않았다.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는데 어머니 마음이 당시에 어땠을까? 싶다. 중학교 때 키가 172 지금은 173 정도 되는데 초등학교 땐 남자 중에선 제일 크거나 두 번째 이거나 했다. 당시 키가 커서인지는 모르지만, 시장에 가실 때 꼭 나하고 가자고 했다. 한 번은 시장에 갔더니 “떨이”하며, 외쳤다. 무슨 나물로 기억하는데 조금 남은 것, 무지하게 싸게 판다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냥 지나치고 다른 가계에서 사셨다. 집에 가서 왜 떨이 안 샀냐고 여쭈어보니 그 집은 누구든지 금방 사서 마저 팔고 집에 가지만 물건 산 집은 마수걸이도 못 한 것 같아 그렇게 하셨다고 하셨다. 마수걸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또 한번은 달걀 한 꾸러미를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두 개가 깨져있었다. 얼른 가서 바꾸어 올까요 하였더니 그냥 놔두라고 하셨다. 단골집인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 것이고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어차피 살 것인데 그 사람 기분 나쁜 것, 대신 받았다고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곤 다음에 그 가게에 가셨어도 그 일은 함구하셨다. 주로 단골 가게에 가셨는데 물건을 하나 하나 고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꼭 어느 정도를 상인에게 달라고 하였다. 덤이라도 드린다고 하면 한사코 사양하셨다. 당시 생각에 어머니도 장사하셔서 그러나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 여쭈어보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너무 멋져 보였다. 아버지가 셈배(생과자 일본말)를 만들고 어머니가 주로 팔았다. 가게에 극장 관계자가 와서 포스터를 붙이고 초대권 2장씩을 주었는데 근처 가까운 극장이 3곳이나 있어서 한 달에 3번 이상은 어머니와 영화관람을 하였다. 저녁엔 아버지가 가게 보시고 나를 데리고 영화 구경을 하셨다. 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았다. 어차피 초대권으로 보는 것인데 어린 나이에도 안소니퀸배우에 빠졌다. 연기를 너무 잘했고 섬세한 표정 연기는 압권이었다. 어머니는 생전에 나에게 공부하라는 말씀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 일제고사인지 뭔지 전교 1등을 한 적이 있는데 집에 자랑도 안 했는데 어찌 아셨는지 어머니가 며칠 뒤에 수업 시간에 금붕어 3마리든 어항을 사 오셨다. 당시엔 최고의 선물이다. 담임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가셨는데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여쭈어보진 않았다. 그 후로 더욱 잔소리 한 번 안 들었다. 알아서 잘할 거라고 하고 믿어 주셨다. 당시에 사는 집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어머니가 돈을 주면 내가 알아서 철물점 가서 전구 나사 손잡이 등 다 사서 새로 달았다. 당시엔 먼저 거주하는 사람이 이사하며 전구 방문걸이 다 가져갔다. 돈이 얼마나 된다고 전입신고도 다 내가 하였다. 당시엔 큰일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음식을 못 하셨다. 상당히 싱겁게 하셨는데 맛이 없었다. 아버지는 무조건 간장부터 치고 음식을 드셨다. 그렇다고 음식 투정을 한 번도 하질 않으셨다. 사실 음식 못 하시는 것을 커서 다른 집 반찬 먹어보고 알았다. 뭐 푸짐하게는 하셨다 한 번은 번데기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경동시장에 가셔서 한 말을 사 오셨다. 동생과 경쟁할 일이 없어졌다. 물릴 때까지 먹었다. 또 한 번은 오징어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수산 시장에 가셔서 한 상자를 사 오셔서 아예 국을 끓이셨다. 배불리 먹었다. 중학생일 때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 주무시다 연탄가스 마셨다. 당시 생과자 구는 가마도 석탄을 개서 연료로 쓰고 난방 취사 모두 십구공탄을 쓰던 시대이다. 아버지는 토하고 어머니는 혼수상태 셨다. 그 후로 당뇨에 걸리셨는데 그것도 나중에 알았다. 어머니는 갑자기 치아가 다 빠지고 아버지는 부분 빠졌다. 어머니는 전부 틀니를 하셨고 아버지는 부분 틀니를 하셨다. 힘이 장사이었던 어머닌 안성에서 쌀 반 가마 정도를 머리에 이고 버스 타고 서울에 오실 정도였다. 외가 동내에 모래배미라고 불리는 모래가 많은 논이 이었는데 모래가 많아서 농사가 잘 안되었는데 어머니는 나중에 외할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땅이니 네가 꼭 찾으라고 했는데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시엔 당뇨라는 용어 자체도 생소한 시절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소갈 병이라고 한약 드시고 일주일에 몇 번 침구사 불러 침을 맞는 정도였다. 침구사가 놓는 침을 보니 별거 아니다 싶어 침을 아예 배웠다. 당시엔 침 부황 가르쳐주는 학원도 있었다. 몇 년을 침을 놔 드렸는데 단 한 번도 따갑다. 아프다 말씀 없으셨다. 점점 기력이 쇠한 것을 걱정하셨고 대단한 일도 아닌데 나를 대견하다고 하셨다. 그렇게 몇 년 보내다 눈이 침침하시다고 하여 큰 병원에 갔는데 2형 당뇨에서 1형 당뇨가 되었다고 인슐린을 매일 아침에 맞아야 한다고 하였다. 인슐린은 피부를 살짝 들어 배나 허벅지에 돌려가며 맞는데 약국에 가서 일회용 주사기를 사서 매일 놔 드렸다. 얼마 전에 알았지만, 인슐린 냉장 보관하는데 맞기 전에 30분 전에 꺼내서 놔야지 금방 노면 몹시 아프다고 한다. 아! 어머니 그 아픈 주사를 그렇게 의연하게 맞으셨습니까? 마치 관운장처럼~ 아버진 어머니 돌아가시고 10년 후에 돌아가셨다. 병원 한 번 안 가시고 노화로 가셨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아버지도 2형 당뇨 이셨던 것 같다. 우리 나이 땐 대부분 그렇지만 보통의 아버지가 엄하시고 잘 못 한 것이 있으면 꾸중을 많이 하셨는데 우리 아버지도 공부하란 말씀 안 하셨어도 사소한 것 아끼지 않는 것엔 꾸중을 많이 하셨다. 가령 밥 먹고 밥상 행주로 안 닦고 휴지로 닦고 하면~ 야단을 많이 맞았다. 근데 참 이상하다. 아주 존경하는 어머니보다 조금 덜 존경하는 아버지가 더 보고 싶다. 어머니가 임종 전 한 달 전 내게 한 말씀 때문일까? 아버지 나중에 무시하지 말고 잘 모셔라. 아버지와 관계는 돈독해지지는 않았지만 서먹서먹해지지도 않았다. 아버지도 임종 전에 너 마음 잘 안다고 알 듯 모를 듯 말씀하셨다. 예전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부모를 그리워하고 눈물짓는 것 보고 다 늙은 사람들이 왜 그러나 하고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젠 조금 이해가 된다. 야단과 꾸중이 그립다. 잘살고 있는 건지 하루하루 까먹는 건 아닌지 두 분이 생전에 뭘 좋아하시고 어떤 일을 싫어하셨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전부 가난하게 살았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전에 왜 어렵지도 않은 간단한 말 못 했을까 후회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출처: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1군단 원문보기 글쓴이: 청천고부내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2군단 > 크리에이터 정관진 저작권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나는 꼰대다! (0) | 2024.06.11 |
---|---|
스크랩 음(陰)성 식품, 양(陽)성 식품이 있습니다. (0) | 2024.06.05 |
스크랩 무엇을 먹으면 안 됩니까? (0) | 2024.05.29 |
스크랩 쉬어가기 (0) | 2024.05.27 |
스크랩 진맥에 대하여 (0) | 202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