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은 교수가 그린 그림
폐암으로 치료 받으시다가 완화의료센터에 입원하신 88세 환자분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 분은 인내와 성실 이 두 가지로 삶의 어려운 순간들을 극복하신 분입니다. 그러다가 암을 진단 받으셨고, ‘결국 질병 앞에 무릎 꿇은 것 같다’며 원통해하셨습니다.
제가 이 분을 유독 오래 기억하는 건 혼자 지내시는 시간이 거의 없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돈 잘 버는 사위 만나 풍족하게 하는 큰 딸, 환자분을 똑 닮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는 아들, 경제적으로는 조금 부족해도 살가운 사위와 살림꾼 막내딸이 교대로 아버지를 돌봤고, 때때로 대학생 손주들이 할아버지 곁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트로트 뮤직비디오를 보여드리곤 했습니다. 그동안 환자분이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고, 사랑을 나누었는지 알 수 있었죠.
그런데 이 환자분은 저와 함께하는 미술치료 시간마다 ‘슬프고 처량하고 원통하다’며 곱씹는 과거의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태어났더니 유복자였어요.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그저 배 굶지 않으려고 한 게 머슴 살이었어요. 남들 보기 부끄럽다는 생각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 또래 애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지요. 다들 책보를 메고 웃으며 길을 걷는데 나는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향하니 내 신세가 처량하고 한심할 뿐이었지요. 벗어나려고 애써도 벗어날 수 없는 내 신세, 산으로 얼른 올라가 바위에 앉아서 학교 가는 아이들을 마냥 바라보곤 했습니다. 바위에 앉아있는 내가 부끄러워서 나쁜 생각도 하고….”
마치 환자분은 지금 그 일을 겪고 있는 아이처럼 훌쩍거리면서 속상한 기억을 떠올리셨습니다.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성공하고 자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멋진 분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 때문에 암에 걸린 지금의 신세가 스스로를 더 슬프고 한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저는 환자분이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아낸 힘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어려운 삶을 극복했던 내용을 정리해, 가족 모두를 초대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할아버지의 지혜로운 삶의 여정이 발표되는 순간이었지요. 외로움을 극복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손주들은 ‘레전드다’라며 환호했습니다. 며느리는 ‘남편이 아버님 닮아서 이렇게 듬직하네요’라고 거들었고요. 억울하기만 한 인생을 산 게 아니라 ‘억울한 인생을 멋지게 극복하고 사랑받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환자분 스스로가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바위에 앉아 학교에 가는 또래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던 어린 시절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지 물었습니다. 환자분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포기하지 말아라. 너에게도 좋은 가족이 생길 거니까. 너는 멋진 인생을 살고 가족들에게도 사랑받을 거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가족 모두가 눈물을 훔쳤습니다. 이제 더 이상 환자분은 학교 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아이로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곳에 있던 모두가 마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날 저녁, 퇴근 준비를 하던 저에게 환자분이 하나의 그림을 부탁하셨습니다. 바위에서 일어나 숲길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그려달라고요. 서둘러 그림을 그려드렸고 환자분은 “정말 내 고향 나무하러 갔던 그 숲길 같다”며 좋아하셨습니다.
그 환자분이 다른 병원으로 전원하신 일주일 뒤,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며칠 후 환자의 가족들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억울한 팔자를 극복하고 비로소 멋진 할아버지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임종기 환자분들을 보면서 우리는 ‘아픈 것’이나 ‘슬픈 것’에 너무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분들이 살아온 인생, 그 속에서 찾았던 희망, 미소 지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들에 더 집중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해보세요. 통증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희망의 기도를 하시는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4/01/09/20240109020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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