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길로 갈까, 어려운 길로 갈까. 북한산 문수봉은 선택을 강요한다. 어느 쪽이든 어떠리. 어디를 선택해도 가지 않은 길은 남는다./사진=헬스조선DB
살다보면 도처에 갈림길이고, 그 중 유명한 게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갈림길이다. 시인은 젊은 시절, 집 앞으로 산책 나갔다가 두 갈래 길을 만났다. 한 쪽은 낮은 수풀의 내리막길, 한 쪽은 무성한 수풀로 아득한 길. 어디로 갈까.
시인 말고 주말 등산객들도 북한산에서 갈림길을 만난다. 비봉능선 타고 사모바위, 승가봉 지나 1㎞ 정도 가면 표지판 하나가 길을 막는다. 어디로 갈까.
문수봉(어려움) 0.4㎞
문수봉(쉬움) 0.4㎞
◇삶을 한 글자로 요약하면… 어려울 난!
처음 비봉능선을 거쳐 문수봉을 오를 때 표지판 앞에서 생각이 많았다. 어려운 길로 갈까, 쉬운 길로 갈까. 잠깐, 2500년 전 공자를 떠올렸다. 누군가 공자에게 물었더란다. 우리 삶을 한 글자로 요약해주실 수 있나요? 난(難)!
공자는 어려울 난, 한 글자만 얘기했다. 그에게도 삶은 어려웠다. 오래 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어머니의 친구 한 분이랑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됐는데, 그 분도 그랬다. 어때, 사회 나가보니까 생각만큼 쉽지 않지?
그날 비봉능선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문수봉(쉬움)’ 방향을 택했다. 사는 것도 어려운데 산에서까지 뭐하러 어려운 길을…. 쉽게 가자, 쉬운 길로 400m 거리면 정말, 정말 쉽겠네, 생각하면서.
◇쉬운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갈림길의 왼쪽,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쉬운 길은, 쉽지 않았다. ‘애추 지형’이란 게 있다. ‘애(崖)’는 벼랑이고 ‘추(錐)’는 송곳이다. 긴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절벽의 돌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렇게 파편이 된 뾰족 돌들이 쌓이면 애추 지형이다. 심히 불친절한 공간이다. 크고 작은 돌들이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채 지루하고 난폭하게 쌓여 있다. 벼랑 밑이니 경사도 가파르다. 문수봉으로 가는 쉬운 길이 딱, 그 애추 지형이다.
400m가 그냥 400m가 아니었다. 딴딴해진 장딴지와 허벅지를 연신 주무르면서, 또 수시로 쉬어가면서 문수봉 고지를 향해 걸어가고 기어갔다. ‘쉬움’이란 표지판 글씨에 배신감을 느꼈다. 욕 나왔다. 쉬운 길은 어려운 길이었다.
그렇다고 어려운 길이 쉬운 것도 아니다. 쉬운 길에 데고 나서 얼마 후, ‘문수봉(어려움)’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 가파른 경사를 올랐다. 100m 남짓의 급경사를, 철골과 로프가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날선 벼랑의 중간쯤에선 경사가 거의 70~80도에 이른다. 어렵다기보다, 뭐랄까, 겁나는 길이다. 온 몸을 긴장시킨 채, 가파른 암반을 밟아가며 로프를 휘잡아야 한다. 그래서 결론은….
◇갈림길을 대하는 山客의 태도
쉬운 길도 어렵고, 어려운 길도 어렵다. 쇠도끼가 돌도끼보다 나은 건 아니라고 누가 그랬다. 쇠도끼와 돌도끼는 그냥 다른 것뿐이라고. 문수봉 가는 길도 그렇다. 쉬움·어려움을 간소한 표지판으로 갈래지어 놓긴 했으나, 어느 한 길이 쉽고, 다른 한 길이 어려운 건 아니다. 두 길은 너무나 다를 뿐, 난이(難易)의 영역을 비껴간다. 난 그래서 문수봉을 오를 때면, 오른편으로 난 ‘문수봉(어려움)’ 길을 택하긴 하지만 권하진 않는다. 사람에 따라선 무서울 수도,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러나 단언컨대, 쉬운 길도 쉽지 않다.
100여 년 전 로버트 프로스트는 집 앞에서 수풀이 무성한 길을 택했다.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이 눈에 들었다. 그러나 사실, 어느 쪽이어도 괜찮았다. 세월이 흐르면, 가지 않은 길과 간 길이 남을 뿐이니까. 간 길, 가지 않은 길의 실체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젊은 시절에 민감하던 수풀의 흔적은 비바람에 사라지고, 세월에 잊힌다. 어느 길을 택하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것, 그것만이 갈림길을 대하는 산객(山客)의 태도다. 아무래도, 시인을 곡해한 걸까.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3/11/20210311025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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