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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의 장/여행을 떠나요

[아무튼, 북한산] 슬픈 백운대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21. 2. 28.

백운대에 계단과 철제 난간이 처음 설치된 건 일제 강점기다. 1960년대에 우이동에서 도선사로 향하는 도로까지 뚫리면서 백운대의 ‘슬픈 운명’이 시작됐다./사진=헬스조선DB

사는 게 가팔라 힘에 부치면 백운대에 오른다. 삶만큼 가파르고 험준한 백운대 암릉을 넘으면서 살아내느라 얻은 조울(躁鬱)을 털어낸다. 그렇게 조금은 상쾌해진 기분으로, 836m 정상을 향해 나를 앞지르고 있는 철제 난간들을 움켜잡다가 생각했다.

이게 없을 땐 여길 어떻게 올랐을까?

◇철제 난간도 없이… 어떻게 백운대에 올랐을까?
거대한 암릉의 정상 부위를 층층이 감싼 구조물들이 없을 때에도 이리 많은 사람들이 백운대를 올랐을까, 누구든 오르긴 했을까. 암벽을 타는 클라이머들이야 철제 구조물 없이도 스윽, 스윽 백운대 정상에 잘도 오르겠지만, 절경도 맛보았겠지만, 나 같은 등산객들은 어땠을까. 위문(백운봉 암문)을 지나 40~50m쯤 가다가 망연히, 막연히 구름에 휩싸인 백운대 정상을 바라만 보았을 것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솟은 중생대의 화강암에 숙연했을 순간들, 사람들.

그런데 정상에서 거센 바람을 맞으며, 멀리로 펼쳐진 서울의 북서와 경기를 보고 있자니 상상도 지리를 따라 멀리 떠난다. 그래, 500년 전, 1000년 전 고려나 조선 때는 어땠을까? 삼국시대에는? 이런 전략적 요충지를 그대로 두었을까. 바라만 보았을까. 어떻게든 올랐겠지. 어떻게 올랐을까.

 

◇넝쿨을 움켜쥐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다
자연에 맞서는 옛 사람들의 능력은 현대인들을 능가했다. 암벽을 타고 넘는 건 어느 정도 기(氣) 싸움의 영역인데, 그들은 자연과의 기 싸움에서 유약한 현대인의 수준을 훌쩍 넘었다. 그래도, 그래도 바위틈마저 사라진 곳곳에서 손 두지 못하고, 발 딛지 못해 당황했을 텐데, 그 상황을 어찌 돌파했을까. 두 평 남짓, 백운대 최정상부의 좁은 공간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고, 내려오다 단서를 발견했다.

넝쿨 움켜쥐며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흰 구름 가운데 암자 하나 걸려있네.
눈에 보이는 곳 우리 땅으로 한다면
오월의 강남 땅도 그 속에 있으련만.

‘연려실기술’에 수록돼 있다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시(詩)다. 백운대 정상 부근에 세워진 안내 구조물의 내용이다. 원문은 물론 한자이고 제목은 ‘등백운봉(登白雲峰)’이다. 그러니 이성계가 백운대에 직접 오른(登) 뒤에 쓴 시다. 오월의 중국 땅이 어찌 눈에 보였겠느냐만, 한 나라를 일으킨 인물이 간만의 산행에 취해 뱉은 호언과 장담이니 넘어가주기로 하고 시를 살피자. 중요한 건 이성계가 ‘넝쿨’을 움켜쥐며 ‘푸른’ 봉우리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제 몸으로 가져와 내뿜는 도시의 독기(毒氣)와 우악스러운 등산화들의 공격으로 지금은 밋밋한 바위의 연속일 뿐이지만, 500년 전엔 달랐던 모양이다. 바위 사이사이로 질긴 넝쿨들이 뿌리를 박았다. 어쩌면 나무들도 있었던 걸까. ‘푸른 봉우리’는 그저 시적 표현일 수 있지만, 나뭇잎의 푸르름을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도시의 毒氣와 소란… 백운대는 아프다
조선의 왕이 힘겹게 올랐던, 넝쿨 넘쳐나고 푸르른 백운대는 이제 없다. 주말이면 수천의 등산객이 거의 짓밟는 수준으로 백운대를 오르내린다. 주말 한낮의 백운대는 명실상부, 도떼기시장이다. 철 구조물 총총한 외길을 지나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태극기 휘날리는 백운대 최정상에서 인증 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긴 줄과 소란은 불쾌하기까지 하다. 세월과 풍파에도 아랑곳 않던 거대 화강(花崗)의 암릉은 이제 맨살을 다 드러낸 채로 피곤하고 창백하다.

슬픈 백운대라 해야 할까. 흰 구름(白雲)에 휩싸인 채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신성하고 거룩했던 영봉(靈峯) 백운대는 이제 지쳤다. 아프고 우울하다. 상처와 우울의 연원까지 명백하고 뚜렷해 더 미안하다. 백운대를 주말의 시장(市場)으로 만든 두 가지 ‘역사적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100년에 걸친 상처, 우리가 보듬어야 하지 않나?
푸른 백운대에 처음 철제 난간을 설치하고 계단을 만든 건 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다. 서릿발 같은 백운대의 정기(精氣)를 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등반대회까지 여러 차례 열어 백운대를 밟고 또 밟았다. 민족의 영산을 시장바닥으로 만들고 싶었다. 또 한 가지 일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초창기에 있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로 통하는 도로를 넓게 냈다. 일단 도선사 곁에 서면 백운대는 한 달음이다. 숙련된 산악인이 아니어도 맘먹으면 휴식 없이 백운대까지 치고 올라간다. 백운대는 그렇게 관광지가 됐다. 도로와 쇠 난간이 백운대를 아프게 했다.

그래도 이미 뚫린 산행의 길을 막겠는가. 도로를 없애고, 박힌 난간을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발걸음과 호흡으로 인해 100년 가까이 신음해 온 백운대의 우울과 상처를 마음으로라도 보듬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부터 백운대 위에선 우리 모두 초라해지자, 작아지자. 잠깐이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서울을 지켜온 성산(聖山)에게 예를 표하자. 그리고 제발, 소란 떨지 말자.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2/26/20210226018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