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중첩첩 늘어선 북한산의 봉우리들. 저마다의 이름으로 달이 되었다, 용이 되었다 한다. 성(聖)과 속(俗)과 자연이 서로를 부딪고 아우르는 절경이다./사진=헬스조선DB
북한산엔 몇 개의 봉우리가 있을까. 고(古)지도가 전하는 말 다르고, 요즘 지도들이 하는 말 달라 헷갈린다. 웬만한 언덕에도 ○○봉이란 이름을 붙이는 호사가들까지 출현해, 많을 땐 그 숫자가 40개에 이른다. 혼돈 중엔 자신만의 기준이 최선이다. 내 기준은 자운봉과 만장봉을 산책하다 내려오는 중에, 전철 1호선 도봉산역 쪽으로 통하는 탐방지원센터에서 집은 ‘북한산 국립공원 안전지도’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묶어 ‘북한산 국립공원’이다. 지도에는 북한산의 봉우리들도 또렷하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동국제약이 후원해 만든 지도다. 왜 동국제약일까, 잠깐의 궁금으로 족하다. 지도 앞에 ‘새살이 솔솔~’이란 카피와 함께 ‘마데카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산행 중에 무릎이라도 까지면 마데카솔 연고 사서 바르란 얘기군. 제약회사에서 마케팅하는 분들 참 기민해…. 각설하고.
◇헤아려보아야 부질없지만…
전철에서 지도를 펴고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짚어봤다. 어디서 출발할까. 청수동 암문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언젠가 문수봉 아래, 청수동 암문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한 적이 있다. 청수동 암문은 북한산 산행의 요충지다. 북한산의 주요 능선 세 개가 만나고 헤어진다.
산성주능선
북쪽으로 산성주능선을 타면…. 문수봉, 시단봉, 용암봉, 노적봉을 거쳐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으로 향한다(7개). 백운대 아래 위문에서 우이령 가는 우이능선을 타면 영봉이 추가된다(1개). 위문에서 대서문으로 내려가는 원효봉능선을 타면 염초봉, 원효봉이 기다린다(2개).
의상능선
서쪽으로 의상능선을 타면….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이 차례로 솟았다 가라앉는다(6개).
비봉능선
산성 외곽 방향 구기동, 불광동으로 이어지는 비봉능선을 타면…. 승가봉, 비봉, 향로봉, 족두리봉을 만난다(4개). 승가봉 지나 사모바위에서 진관사 쪽으로 방향을 틀면 응봉능선에서 응봉을 만난다(1개). 빠진 데가 있다. 문수봉 옆으론 보현봉이 우뚝하고(1개), 대성문에서 대성능선을 거쳐 평창동으로 내려가다 보면 형제봉이 나타난다(1개).
헤아려보아야 부질없지만, 그래도 아쉬워 더해보면…, 7+1+2+6+4+1+1+1=23. 마데카솔로 유명한 동국제약이 후원해 만든 ‘북한산 국립공원 안전지도’ 기준으로, 북한산에는 이렇게 23개의 봉우리가 모여 있다.
◇聖과 俗이 부딪치며 서로를 비껴가는 그 절경
머릿속에 23개의 봉우리를 입력한 후, 좋은 날 골라 종일 북한산을 종횡했다. 그리고 경탄했다. 중중첩첩,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에만 놀라지 않았다. 씩씩한 등산객을 더 놀라게 한 건 23개 봉우리에 부여된 이름들, 그 현란한 네이밍이었다. 성(聖)과 속(俗)이 서로를 부딪고 아우르는 동안, 자연이 그 사이를 중재하고 보듬는 진경(珍景).
성(聖)
의상봉에 서면 저 멀리 산성의 반대편으로 원효봉이다. 의상과 원효의 동행과 결별은 불교사(史)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감화를 준 드라마다. 첨단의 불교를 배우기 위한 중국행, 어느 날 밤 원효의 갈증 그리고 해골, 알고 보니 썩은 물, 중국행의 단념. 원효와 의상은 제 갈 길을 갔고, 나름의 방식으로 불교를 혁신, 전화(轉化)했다. 그 걸출한 사상가 또는 신앙인들이 거대한 북한산성을 남북의 양쪽에서 보듬는 중이다.
문수봉과 보현봉은 어떤가. 문수는 지혜의 보살이다. 궁극의 지혜를 상징한다. 정상 부근 은밀한 곳에 문수사가 자리한 이유로, 걸출한 봉우리는 문수봉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지혜는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만행(萬行)의 보살 보현을 동무 삼아야 세상에 나선다. 700미터 남짓, 문수봉과 엇비슷한 고도의 옆 봉우리를, 사람들은 그냥 두지 않고 보현봉이라 불렀다. 본래 좌(左) 문수, 우(右) 보현이다. 문수와 보현은 석가모니 부처를 가운데 모신 채, 동아시아판 삼위일체를 지향한다, 대웅전 안에서처럼, 북한산 정상에서도.
속(俗)
북한산은 그러나 성(聖)의 홀로 득세를 두지 않는다. 저 산 아래 불광동에서 시작해 비봉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봉우리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예복 입을 때 머리에 올리는 관(冠)이었다가(족두리봉), 향을 피우는 화로로 변신한다(향로봉). 그렇게 일상을 파고드는가 하면 또다시 천년 역사를 거슬러 신라 진흥왕의 한강 제패를 기념한다(비봉).
자연(自然)
그러나 저 멀리서, 높이서 북한산 전체를 부감(俯瞰)하는 백운대로 눈길을 돌리면 성도 속도 사라진다. 태고의 암봉을 휩싸고 도는 흰 구름(白雲)만 남는다. 그 옆으로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이 모여 만 가지 경치를 자랑하고(萬景臺), 대동문 쪽으로 질러가면 일출인지, 일몰인지 붉은 태양을 기리는 시단봉(柴丹峯)이 조붓하다.
◇달이 되었다가, 용이 되었다가…
그렇게 세월 쌓인 위로 사람들의 오랜 갈망과 감상까지 더해져, 북한산 봉우리들은 밤낮없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한바탕 쟁패를 벌이는 중이다. 쟁패의 와중에 예상치 못한 절경들이 펼쳐지는데, 문수봉에서 시작해 울끈불끈, 꿈틀거리며 내려가는 의상능선이 그런 경우다.
어느 가을, 백운대에 올랐다가 웅혼한 기세로 서진하는 의상능선을 넋 잃고 관망한 적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묘한 능선 위로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풍경이 아득하다. 생사를 초월한 성자의 이미지가(나한), 갑자기 성스러운 달로 변하더니(나월), 다시 움츠린 용이 되고(용혈), 이어 항룡(亢龍)을 꿈꾸는 비룡(飛龍)으로 변신한다(용출). 꼭 의상능선 아니어도 북한산의 험준한 봉우리들은 곳곳에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강기(剛氣)를 내뿜고, 나는 그 앞에서 많이 작아진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3/10/20210310011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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