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된 장기를 어떻게든 회복시켜 보겠다고 꿰매거나 뚫거나 자를 필요가 없다. 이를 대신해 ‘원래 장기와 똑같은 모양과 성질을 가진’ 새 장기로 끼워 넣으면 그만이다. 상처로 남을 수 있는 ‘아픈 기억’을 끌어안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지워 버리고 좋은 ‘새 기억’으로 바꿔 넣으면 된다. 약은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 입력된 프로토콜대로 조제하면 된다.
환자의 기본 생체 정보를 측정하기 위해 간호사가 수시로 환자를 찾을 필요도 없다. 이정도 쯤은 환자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기계가 스스로 인식해 간호사에게 전송한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아플 가능성이 높은 질환에 대한 조치는 사전에 취한다. 더 이상 아플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상당수의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 인력도 필요 없을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의료 환경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위의 몇 가지 줄기들로 대략 정리된다. 그래서일까. 유엔 세계미래회의의 ‘2030년 사라지는 10가지’ 중에는 ‘의사, 병원 진료, 수술’이 포함돼있다. 아주 먼 시점의 얘기도 아니다. 20년도 채 안 남은 가까운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더 막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변화의 핵심은 ‘개인 맞춤화’와 ‘디지털화’라는 큰 두 가지의 줄기로 정리된다. 줄기세포 기술, 유전체 분석 기술 등은 개인 맞춤화이고, 생체정보 진단 및 3D 프린팅 등은 디지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이 두 줄기가 평행선을 긋고 있다. 3D 프린팅 기술로 모양은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아직 사람의 유전자와 똑같은 줄기세포 성분의 잉크 소재는 개발하지 못했다. 뇌 신경세포를 조작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은 성공했지만, 어느 시냅스를 차단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인별 뇌 속 정보의 비밀은 아직 풀지 못했다.
하지만 머잖아 이 두 줄기가 접점을 이룰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함께 예측해 보자. 정말 의사와 간호사의 상당수가 사라지고 병원 진료와 수술이 없어질까? 미래로 달려가는 의료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 전 세계가 집중하는 3D 프린팅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국정연설에서 3D 프린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미래산업의 한 분야로 중점적으로 키워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미국의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해외의 값싼 노동력 시장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3D 프린팅 산업은 미래산업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주력 분야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중국, 일본 등에서도 앞다퉈 3D 프린팅 산업에 주력할 것임을 밝히고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중국은 2012년 ‘3D 프린터 기술 산업 연맹’을 설립했다. 그리고 중국의 ‘국가 기술발전 연구 계획 및 2014년 국가 과학기술 제조 영역 프로젝트’ 지침에 3D 프린터를 포함시켜 4개 연구과제를 착수했다고 한다. 특히 2009년부터는 중요 방식의 특허가만료돼 좀 더 대중화되고 있는 추세다. 국내 3D 프린팅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김완두.이준희.박수아 박사(한국기계연구소)에 따르면, 세계적인 시장조사 기관인 가드너는 2014년 10대 전략기술로 3D 프린팅을 포함시켰으며, 전 세계 시장규모가 2012년 2억9000만달러에서 2017년 57억3000만달러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첨단기술을 융·복합하는 창조 경제의 일환으로 3D 프린팅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으며 국내 유명 경제연구소에서는 미래를 바꿀 7대 혁신기술의 하나로 3D 프린팅을 지목했다.
- ▲ 3차원 CT와 MRI에서 얻은 입체 영상(왼쪽)을 3D 프린터에 입력한 후 3D 프린팅 기술로 똑같이 재현한 모형(오른쪽). 위 사진 이 혈관이고, 아래 사진이 얼굴 골격이다.
3D 프린팅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3D 프린팅은 과거의 제조방식과 어떻게 다르며, 세계 각국은 왜 앞 다투어 주력할 것을 천명하는 것인가? 전통적인 제조 방식은 필요한 부품이나 물건을 주어진 설계도에 따라 원재료를 두들기고, 갈고, 깎는 이른바 절삭 가공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다. 반면 3D 프린팅은 설계도를 입력하면 이를 바탕으로 액체 또는 가루형태의 폴리머나 금속 등을 한층 한층 쌓아올려 3차원의 입체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들기 복잡하고 어려운 모양을 ‘깎아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설계도를 바탕으로 ‘쌓아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쉽고 빨라진다. 설계도와 ‘프린팅이 가능한 재료’만 있다면 이론상으로는 모든 제품을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고, 이런 가능한 재료에는 내피세포나 근육세포 같은 세포도 포함되므로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제3의 산업혁명’이라고도 불리는 3D프린팅은 이미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적용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영역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 3D 프린팅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다. 의료 분야로의 적용도 활발한데 최근 혈관과 악안면 및 두개골 골격을 재현해 내는 데도 성공했다. 사진(왼쪽 첫 번째)은 머지않은 미래에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관절뼈 부위의 3D 프린터를 예측해 만든 모델이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똑같이 만들어 이식한 후 이 얼굴로 죄를 짓고 다니는 내용의 공상과학 영화 <페이스오프>가 실제로 가능해지고 있다(가운데 사진). 3D 프린팅 기술로 똑같은 얼굴 만들기가 가능해 졌기 때문이다. 오른쪽 끝 사진은 3D프린팅으로 방 송인 김현중과 똑같은 입체 얼굴이 출력되는 모습이다.
#2 의학 분야에서 부는 3D 프린팅 바람
의학 분야에도 서서히 3D 프린팅 바람이 불고 있다. 많은 임상 및 기초의학 각 진료과에서 3D 프린팅 적용에 관한 다양한 연구와 임상적용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환자의 각각 다른 상태를 CT 등의 영상장비를 통해 진단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이런 영상장비를 설계도로 활용해 환자 각각에 맞는 3D 프린팅 기법이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의학에 적용하는 3D 프린팅은 다양하지만 크게 몇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수술 성공률 높이기 위한 모의수술로 활용
뇌수술이나 대동맥수술처럼 어렵고 복잡한 수술 전에 수술 부위를 3D 프린팅 해서 중요한 구조에 대해 숙지하고, 모의수술이나 수술 및 시술의 계획에 사용하는 경우다.
- ▲ 3D 프린팅을 활용해 사람의 혈관을 똑같이 재현하는 데 성공한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흉부외과 강준규 교수가 환자에게 혈관 모형을 설명하고 있다(사진 왼쪽). 부비동암 수술 시 훼손되는 얼굴 골격 부위를 3D 프린팅 기술로 정확히 재현해 수술에 성공한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백정환 교수와 얼굴 골격 모습.
좀더 정확한 수술 및 시술이 가능하게 되므로 더 좋은 결과를 더 빠른 시간에 달성할 수 있다. 또한 출력물을 통해 환자나 보호자에게 더 효과적이고 명확한 설명을 할 수 있으며 학생, 간호사 등의 교육에 사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국내에서도 뇌수술이나 대동맥수술의 수술 전 사용에 관한 보고가 있으나 비싼 프린팅 비용과 비용 청구 문제 등이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성모병원 심장외과에서는 흉부외과 수술 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대동맥수술을 앞둔 환자의 CT를 바탕으로 대동맥 모형본에 대한 3D 프린팅을 실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수술 전 계획을 수립하고 시술에 사용되는 스텐트의 크기, 모양, 길이를 좀 더 정확하게 디자인할 수 있었다. 2002년 미국에서는 샴쌍둥이를 MRI로 촬영해 3D 프린팅으로 출력한 후 두 아이를 분리하는 수술에 대한 예행연습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수술을 안정적이고 성공적으로 시행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인공 장기 제작도 가능할까
3D 프린팅을 의학에 적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손상된 장기 등을 대신할 수 있는 대체물을 만들어 이식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학 가장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임상 분야에 따라서 이미 상당 부분 진전돼 이식이 진행되는 분야도 있는 반면에, 아직 활발한 연구에만 그치고 있는 경우도 있다.
3D프린터로 인공 조직을 만드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3차원 틀을 찍어 낸 뒤 그 안을 인간 세포로 채워 발육시키는 방법과, 줄기세포 등 생체재료를 직접 출력해 곧바로 인공 조직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다. 세계적으로 두 가지 모두 시도되고 있고, 성공사례도 나왔다.
다양한 예를 들어 보자. 교통사고로 인해 두개골이 심하게 함몰된 환자의 경우 맞춤형 인공뼈를 제작해 넣어 줄 수 있고, 치과 치료에서 인공 치아를 제작해 임플란트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조직세포나 줄기세포를 직접 3D 프린팅해서 인공장기를 제작하는 ‘바이오 프린팅’ 기법은 여러 분야의 의사와 환자들에게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줄기세포를 이용하거나 조직세포를 직접 ‘프린팅’해 장기를 만들 수 있다면 공여자만 기다리고 있는 심부전이나 신부전 같은 수많은 말기 장기부전 환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 될 것이다.
- ▲ 3D 프린팅 기술로 혈관 모형을 만들어 내는 과정
인공 장기 제작의 현주소
세계 각국에서는 이런 바이오 프린팅을 이용한 인공 장기의 제작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이미 실험실 단계에서 인공 간, 인공 신장 등 인공 장기의 제작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수술이나 스텐트 삽입으로도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운 사지 말단(末端)의 매우 작은 소구경 혈관이 막힌 경우나 공기가 지나가는 길인 기도 질환으로 기도를 절제해야 하는 경우 등은 현재 특별한 대안이 없는 상태다.
이런 환자들을 위해 혈관 세포를 이용해 소구경 혈관을 제작하고 기도의 연골세포를 이용해 인공 기도를 만드는 시도는 이미 상당한 진척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인체의 장기뿐 아니라 혈관에 삽입되는 스텐트 등 각종 인체 삽입물의 맞춤형 제조를 위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으며, 골절 후 고정하는 캐스트(깁스)나 하지 마비 환자의 보행 및 움직임을 돕는 기계 제작도 활발하다.
#3 불가능의 가능을 약속하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3D 프린팅은 산업의 각 분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개인용 3D 프린터도 보급돼 시판되고 있다. 3D 프린팅 산업에 관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이 산업이 얼마나 빨리 발전해 나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 반드시 집중해야 하는 분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의료에의 3D 프린팅의 접목은 많은 부분에서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줄 것으로 보인다. 많은 임상 의사들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노력이 가까운 시일 내에 현실화될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연구를 위해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해 미래의 국가적인 먹거리로 인식해 재정지원도 확대해야 한다. 아직도 억대의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접근이 극히 제한된 심장이식이나 심실보조장치 등을 포함한 인공심장을 바이오프린팅을 이용해 처음 개발했다고 생각해 보라. 이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 ▲ 강준규
강준규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흉부외과 교수.
최근 사람의 대동맥과 똑같은 모양의 혈관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월간헬스조선 11월호(72페이지)에 실린 기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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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글 김현정 편집장
기고자 강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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