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무도회는 서양 귀족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가면 뒤에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밤새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춥니다. 우리나라의 탈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면무도회보다는 밝고 건강해보이지마는 역시 탈속에 숨어서 갖가지 갈등을 풀어냅니다.
그런데, 인체의 질병도 가면이나 탈을 쓴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중에서도 특히 위장관(위, 소장, 대장을 통틀어서 지칭함)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80~90%가 가면이나 탈이라는 겁니다.
여러 가지 위장장애 증상을 보여 의사가 치료를 해도 기대한 만큼 효과가 나지 않고 재발을 반복하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결국 신경성이라는 진단으로 위장과 상관없는 신경과 약을 처방받게 됩니다. 실제 이러한 투약은 증상의 호전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가면 뒤에 숨겨진 병의 본질은 정신적인 울증(鬱症)이고, 겉으로 드러난 것은 위장장애입니다. 이런 기전을 잘 알고 있던 옛사람들이 만든 병명이 바로 ‘가슴앓이’입니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슴앓이라는 말을 의학사전에서 찾아보면 ‘역류성 식도염, 소화성 궤양’ 등으로 해석됩니다. 고약한 위장장애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까?
가슴앓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의 한과 고통이 어떤 질병으로 치환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표현이 서양에도 있는데, 하트번(heart-burn)이라고 합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타는 심장’ ‘불타는 가슴’인데, 일반적으로 가슴앓이로 번역합니다. 서양의학에서는 위장장애의 직접적인 원인을 흡연이나 음주, 소염제의 남용, 불규칙한 식사 등으로 봅니다. 또 헬리코박터 파이로리라는 세균 감염을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질병 발생 원인에 있어서 ‘내 탓이오’를 중시하는 한의학에서는 환자 자신의 문제점을 살핍니다. 그러다 보니 ‘걱정거리가 많아서 소화기가 상한 사려상비(思慮傷脾), 스트레스가 뭉쳐서 생긴 간기울결(肝氣鬱結)’등을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위장장애의 주된 원인이 고통의 바다와도 같은 힘든 세상을 살다가 ‘속이 썩어서’ 생긴 병이라고 본거지요.
서양의학자들도 ‘속이 썩으면’ 어떻게 되나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소화성궤양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시도한 실험인데, 유럽의 국제 소화기 학회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원숭이를 의자에 묶어놓고 서서히 찬물이 가득한 욕조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면서 원숭이의 입을 통해 내시경을 넣고 위장의 반응을 관찰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숭이는 괴로워하며 위장의 내부가 충혈되다가 점점 붉어져 결국 출혈이 시작되었다.’
가슴앓이는 서양의학적으로는 역류성식도염, 소화성궤양에 가장 가깝고, 한의학적으로는 탄산(呑酸), 조잡( 雜), 오뇌(懊 )에 가깝습니다. 역류성식도염은 위장기능 장애로 위산이 식도로 거꾸로 역류하는 증상이고, 소화성궤양은 식도, 위, 십이지장의 점막이 위산에 의해 파괴되어 헐은 겁니다.
탄산은 위의 신물이 목구멍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가면서 가슴이 쓰린 증상이고, 조잡은 명치 아래가 불쾌하며 괴로운데, 배가 고픈듯한데 고프지 않고, 아픈듯한데 아프지 않은 증상입니다. 또 오뇌는 가슴이 몹시 답답하고 괴로운데, 무엇이 뭉쳐있는 것 같으며 불안정한 증상입니다. 동의보감에서 오(懊)는 ‘괴롭다’는 뜻으로, 뇌는 ‘답답하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마음의 병이 고통의 가면무도회를 벌이는 모습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후, 위장에게 명령합니다. ‘빨리 움직여서 소화시켜라’ 당연히 위장은 묵묵부답이지요. 위나 심장 등, 생명과 결부되는 중요 장기들은 뇌의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뇌가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증거인데, 어쨌든 위와 같은 중요 장기들은 자율신경에 의해 스스로 조절되고 있습니다. 자율신경을 망치는 최대의 적은 스트레스입니다. 위장장애 - 가슴앓이 - 하트번이라는 맥락으로 이어지는 배경입니다.
전통적으로 의사는 의공(醫工)이라 불렀는데, ‘몸을 고치는 기술자’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종교인의 영역이고 의사는 몸만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치고 제대로 된 의사는 드뭅니다. ‘마음’은 흔히 치료 기술이 떨어지는 돌팔이 의사의 피난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장장애 치료에 있어서는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위장장애는 스트레스에 의한 울증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울증이 가슴앓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위장장애에 대해 접근할 때 위장관의 이상만 바라본다면 병의 뿌리를 뽑지 못하고 끊임없이 재발을 반복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환자는 실망하게 되고 결국 자신은 회복할 수 없는 중증 환자라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위장장애는 마침내 그 사람의 삶과 함께하게 됩니다. 모든 질병은 환자 개개인이 스스로 인정하고 대접해주는 만큼의 크기로 몸과 마음에 자리 잡게 됩니다. 특히 신경성 경향을 가진 질병은 대부분 그런 기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장관의 점막은 3일에 한번씩 완전히 바뀝니다. 하루에 약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점막세포가 떨어져 나가고 다시 재생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장 장애 완치의 첩경으로, 먼저 내 몸이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 다음 ‘마음을 바꾸는 일’입니다. 위장병의 주원인이 내 탓이고 울증에 의한 것이 확실하다면 울증이 생기게 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찾아내야 합니다. “마음 한번 바꿨더니 여기가 천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도 필요 없고 음식도 가려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늘어나는 의료비용 걱정도 없습니다. 단지 마음만 한번 바꾸면 됩니다. 죄송하지만, 어려우면서도 가장 쉬운 치료법입니다.
전창선 튼튼마디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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