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땐 내가 원하는 길을 걸었지만, 어느 수준에 이르러 나의 미약함을 알게 되는 위치가 되고 나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한다.”
국립암센터 이진수 원장[사진]이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8년이 흘렀다. 지금은 국내 유일의 암 전문 기관의 수장으로 자리한지 1년 반이 됐지만,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의 교수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던 그가 작은 땅 한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을 때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으리라.
당시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후회 안하기로 아예 작정했다”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오고 싶진 않았지만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며 국가와 민족, 대의를 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다졌다.
“글로벌 항암제 개발, 우리도 한번 해보자.“
우리 손으로 항암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거기서 출발했다. 항암제 개발에 대해 이진수 원장은 “국립암센터가 하는 게 아니고 국가가 하는 거다. 우리는 그 인프라를 만들 뿐”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항암제 개발은 표적인자를 발굴해 선도물질과 후보물질을 고르고, 비임상과 임상 0~3상까지 받고 최종허가를 받는데 10년은 족히 걸린다. 시간은 물론 엄청난 투자금을 잡아먹고도 결과물이 보장되지 않아, 민간에선 죽음의 계곡(Death-Valley)이라 불리는 초기 임상 단계를 넘어갈 엄두도 못 내는 게 현실이다.
미국 국립암센터(NCI)조차도 항암제 개발을 위해 막대한 정부 예산을 지원받고도 20년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비난만 받던 때가 있었다.
이 원장은 “무슨 일이든 처음 길 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성공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더 많은 성공신화를 쓸 수 있을 것”이라며 불모지였던 영역에서 성공신화를 만든 골프의 박세리 선수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처럼, 글로벌 항암제 개발도 한번 해보자고 했다.
국립암센터는 현재 특허를 받은 항암후보물질 937개 중에 유망물질 30여개를 선별하고, 정부지원을 위한 타당성 조사 중에 있다. 최종적으로는 5년 내 국가가 주도하는 가교적 신약개발사업을 통해 항암제 개발에 성공하고, 이를 제품화해 해외로 수출한다는 계획이다.
“미국 국립암센터도 하는데, 우리라고 왜 못하나. 제도적 지원만 된다면 우리처럼 똑똑하고 의지력 강한 민족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우리는 안 된다는 부정적 시각만 깨면 된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야
항암제 개발과 더불어, 이진수 원장이 주장하는 또 하나는 국제암전문대학원 설립이다.
그는 “의사를 만들자는 것도, 국립암센터 의사들에게 교수직함을 주기위한 것도 아니다”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나라엔 암전문병원과 암연구소, 국가암관리사업 등을 하나로 연결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관이 있는데, 국제암전문대학원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경쟁할 수 있는 암 전문 요원들을 만들고 이들을 통해 한국식 암관리시스템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 의료계에서 타교출신을 받지 않는 순혈주의를 지적하기도 했다. “획일화된 생각들은 한국 의료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다양성을 인정해 다른 학교는 물론, 다른 나라 학생들도 받아들여 연구하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
우리만의 선진화된 암관리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동남아시아 등에 전파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의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위상을 높여가자는 주장이다.
이진수 원장은 국제적 위상의 필요성을 지난 2007년 세계폐암학회를 서울에 유치할 때 절실히 체감했다. 개최국을 선정할 당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기회가 돌아왔고 한국과 중국, 호주가 후보에 올랐다.
이 원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한국은 브랜드파워가 없었다. 세계인들에게 한국은 딱히 가보고 싶은 나라도 아니고, 북핵문제 위험이 도사리는 국가로 평가받고 있어 설득이 어려웠다”고 했다.
다행이 그가 1985년부터 세계폐암학술대회를 누비며 쌓았던 네트워크를 토대로 개최를 한국에 유치할 수 있었지만, 호주와의 경합에서 단 1표차로 이긴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국제무대는 우리만 잘하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그냥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가 이토록 글로벌화를 외치는 이유다.
“세계최고의 암센터(the world best cancer center)를 위해."
이진수 원장의 목표는 국립암센터를 세계최고의 암센터로 만들어, 국민의 암 발생률과 사망률을 낮추고 암환자의 삶을 질을 높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글로벌 항암신약 개발과 더불어, 첨단 암 진료 기술과 의료기기 개발에도 힘쓸 계획이다. 암센터 의사들이 임상에서 느낀 점을 의공학과 팀과 아이디어를 접목해 성과를 만들고 국가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방안이다.
또한 국립암센터 환자들에게 10년을 앞서가는 선도적 진료를 제공하기 위해 진료서비스를 개선하고, 국제교과서에 등재될 수 있는 연구나 실제 실용화될 수 있는 연구 등에 지원할 생각이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우수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기반과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라면서 “연구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 부여제도를 정착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진수 원장의 방 한편에 붙은 목각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대천명진인사(待天命盡人事). 하늘의 뜻을 받아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진인사대천명에서 순서를 바꾼 그의 좌우명이다. 한국 암치료의 발전이 그의 소명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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