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2군단/알아두면 좋은 암상식

스크랩 [아미랑] 눈물을 흘려도 좋습니다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25. 1. 19.



<암이 예술을 만나면>
 
김태은 교수의 그림./사진=김태은
반짝이는 성탄 조명과 북적이던 연말 행사가 지나고 병원에서 맞이하는 신년은 다소 썰렁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집단 미술치료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모입니다. 진단명, 치료 예후, 종교, 가족, 경제 상황 등이 모두 다른 만큼, 치료사로서 여러 상황을 고려하며 미술치료를 진행합니다. 특히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며 논쟁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남성 환자들과의 시간은 때때로 긴장되곤 하는데요. 오늘은 특별히 중년 이상 남자 환자만 참여했던 집단 미술치료 회기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살뜰한 며느리가 병원까지 모셔다 준 70대분, 아들·아내와 함께 참여한 분, 이 병원에 얼마나 기부를 많이 했는지 모른다며 입장할 때부터 자신의 경제력을 드러내시는 분, 현재 투병 중이지만 심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지지 자원이 충분해 보이는 분…. 그런데 이들 사이에 병동에서 의료진과 늘 갈등을 일으킨다고 하는 환자 한 명이 섞여 앉아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기도 하고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가 되게 음악을 크게 틀어놓기도 하고 그걸 제지하는 간호사에게 거친 말을 내뱉어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와 보호자들 사이, 또 의료진들이 고개를 저을 정도의 ‘참 힘든 분’으로 정평 나 있었습니다.

집단 미술치료 과정 안에서 혹시 이 환자가 또 다른 환자나 저에게 거친 표현을 쓰지는 않을지 살짝 긴장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참여에 소극적이던 사람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집단 미술치료에 참여해 주니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희망에 대해 주제를 설명하고 각자 자신의 ‘희망’을 표현하는 과정은 매우 고요하면서도 집중적으로 진행됐습니다. ‘참 힘든 분’으로 정평 난 환자는 평소와 달리 다양한 미술 재료를 써보고 글씨도 써보며, 제게 그림 그리는 과정에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고요하게 각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좋았는지 제게 음악을 들으면서 하면 더 좋겠다고 했고 다른 환자들에게도 모두 동의를 얻고 음악을 틀었습니다. 그 환자는 “분위기가 좋네” “이렇게 따뜻한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게 참 기분이 좋네” “좋은 경험이야”라며 기분 좋은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다른 참여자들도 “그러네요, 저도 그림 그리는 게 오랜만인데 기분 좋은 경험이고 집중하게 된다”며 호응도 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소개하는 과정에서 더 풍성한 나눔을 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라는 주제는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의 건강이나 행복을 향한 강력한 소망이나 기도를 담기도 하므로 긍정의 힘은 상당합니다.

“내년에 고3이 되는 손자가 있는데 시험을 잘 봤으면 좋겠다” “며느리가 임신 중인데 지금 날 이렇게 보살피고 있다. 내년에 건강한 손주를 출산했으면 좋겠다. 날 돌봐준 며느리에 대한 보답으로 그 손주 육아에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러니 속히 회복해야 한다” “내 마음 평안이 깨졌다. 평생 성당을 다니고 봉사와 기도를 일상으로 하고 살았는데 이런 불안과 공포의 시간이 두렵다. 다시 기도로 평안을 회복하고 싶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런 나눔 때마다 참여한 환자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공감과 지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병동에서 늘 거친 표현을 하는 그 환자의 차례입니다.

그는 양팔을 들며 “나 좀 이상해요. 마음이 이상해”라고 말하다가 울먹였습니다. “나는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그런 희망이 없어요. 나 정말 이상하게 살았나?”라며 눈물을 참으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없고 그저 친척집을 전전하며 어떻게 초등학교까지 마쳤지만 이후에는 신문배달, 우유배달, 막노동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배운 게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점점 적어지고 결혼했지만 실패했고 나는 며느리 손자 손녀도 없고 종교를 가져본 적도 없고 뭔가 이상해요”라고 말하고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애썼습니다.

이때 집단 참여자 중 가장 연세가 많은 80대 중반 환자가 링거를 끌고 일어나 눈물을 꾸역꾸역 참고 있던 환자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겠노, 세상 바람이 모두 자신에게 불어오는 것 같았을 거다.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이 버티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환자는 더 이상 눈물을 참지 않고 아이처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어깨가 들썩이게 눈물을 흘렸는데 그때 연세 드신 환자는 아가를 토닥이듯 울고 있는 환자의 어깨와 등을 토닥였습니다.

울음이 진정된 환자는 천천히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에게 가족은 없지만 아주 작고 소중한 또 매우 영리한 강아지가 있는데 자신의 입원 과정 동안 아는 집에 맡겼다면서 그 강아지가 자신이 퇴원할 때까지 그 집에서 구박받지 않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했습니다. 참여자 모두가 박수를 쳤고 환자의 소중한 강아지가 잘 지내길 바라는 그 마음을 지지했습니다.

집단 미술치료를 마칠 때쯤 환자는 “뭔지도 모르고 참여한 시간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속 시원해졌다”라는 말로 집단원들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집단에 모인 환자들은 모두 공감했습니다. “한국에서 남자로 살면서 시원하게 울어본 적이 없다. 시원하게 우는 게 보석이다. 약이다. 진짜 도움이 된다” 등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당일 참여한 모든 환자가 가장 연장자인 환자의 제안으로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라는 노래를 부르며 집단 미술치료 시간을 마쳤는데요. 저는 정말 아름다운 남성 합창단 공연의 관객이 된 것과 같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미술에 몰입하는 과정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 내면에 중요한 것을 다룰 수 있게 해줍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인 집단은 서로에게 지지가 되고 위로가 되어줍니다. 또 억압된 감정보다는 표현하고 드러낼 때 자유를 얻고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겨울이지만 우리는 지금 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 눈물을 흘려도 내일은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편히 감정을 표현하세요.

여러분의 다양한 감정을 응원합니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5/01/14/2025011401732.html
 

출처: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1군단 원문보기 글쓴이: 니르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