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인이 첩으로 얻은 여인은 젊고 예뻤다. 평소 두 아들에게 자기가 죽고 나면 여인이 다시 좋은 배필을 만나 새 인생을 살 수 있게 하라고 당부했다. 막상 임종에 이르자 섬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노인은 살아있는 부인을 자기 시신과 함께 묻으라는, 그러니까 '순장(殉葬)'하라는 황당한 명령을 내리고 죽었다. 아비의 유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자식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었으나, 정신이 온전할 때 남기신 말씀이 진짜라고 장남이 강력히 주장함에 따라 새어머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훗날 이웃 나라와 전쟁이 발생하여 군대에 징집된 두 아들은 슈퍼 파워를 지닌 적군 장수를 만나 연전연패하는 상황에 이른다. 궁지에 몰려 고민하던 큰아들의 꿈에 도사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풀이 무성한 특정 장소를 일러주며 거기로 적장을 유인하라 말한다. 다음날 도사가 주문한 대로 했더니 놀랍게도 그곳의 풀들이 적장의 다리에 마구 휘감기기 시작했다. 연신 넘어지는 그를 쉽게 제압하여 마침내 두 아들의 군대는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날 밤 꿈에 재차 나타난 도사는 그제야 본인 정체를 밝힌다. 바로 당신들이 자유롭게 해주었던 새어머니의 친정아버지였노라고. 생매장당할 뻔했던 자기 딸을 구해준 게 너무나 고마워서 은혜를 갚은 거라고. 서두가 길어졌는데, 바로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한자 성어의 유래다. 작년에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새 단장을 하여 내놓은 '고우영 열국지(列國志)' 3권에 나온다. 등장인물과 스토리가 복잡한 중국 역사를 쉽게 이해하고 거기서 파생한 고사성어까지 후다닥 익히는 데는 역시 고우영 화백의 만화가 최고다. 좀 뜬금없지만 '결초보은'이란 문구를 요즘 길 가는 차량의 뒷유리창에서 종종 본다. 가운데 '초보'라는 두 글자가 강조된 걸로 보아 유머가 섞인 초보운전 스티커임이 분명하다. 일방적으로 양보와 배려를 요구하는 다른 스티커들보다 뜻이 좋다. 나중에 자기들도 능숙한 운전자가 되면 초보운전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다는 기특한 다짐이니까. 지난 여름 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 중인 딸아이에게 작은 차를 한 대 사주고 왔다. 그 동네에 대중교통이 별로 없어서였다. 아무리 교통 한산한 미국 시골이라도 면허 딴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녀석이 운전을 잘하고 있는지 늘 염려스럽다. 어쨌거나 그 뒤로 우리나라 도로의 뭇 초보운전자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딸아이 생각에 엄청난 참을성과 한없는 관용이 저절로 발휘되면서, 초보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어쩌다 '결초보은'을 써 붙인 새내기 운전자를 만나면 창문을 내리고 '엄지척'까지 해주면서. 초보운전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슬며시 나의 진단검사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 시절이 떠오른다. 당시에 다인용 현미경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아 판독실을 드나드는 여러 사람에게 말초혈액이나 골수 슬라이드를 구석구석 보여주며 설명하는 일을 '현미경을 운전한다'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초보 레지던트에게 현미경 운전은 큰 스트레스였다. 눈부시게 환한 불빛 위로 띄엄띄엄 혹은 뭉텅이로 널려있는 세포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노라면, 가끔 비포장도로 자동차 운전할 때보다 더한 멀미가 났다. 또 진단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악성 세포를 간신히 찾아놓았는데 컨퍼런스 시간에 꼭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만 하면 그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춰서 식은땀 흘리기 일쑤였다. 내비게이션도 없이 낯선 길에서 헤매는 초보운전자의 심정. 주변엔 도움 청할 이 하나 없는데 눈 부라리는 동네 건달들에 둘러싸인 느낌. 게다가 그때 모교 병원에서는 진단검사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가 내과 외래에서 콜을 받아 골수천자를 직접 시행하는 일까지 맡았다. 현미경 보는 건 '운전'하는 수준이었지만, 엎드린 채 엉덩이를 드러낸 환자의 장골을 굵은 바늘로 찔러 골수를 채취하는 일은 '전투'에 가까웠다. 초보 레지던트는 덜덜 떨면서 이 '피 튀기는' 싸움을 외로이 치러내야 했다. 주로 주식이나 스포츠 분야에서 초보자가 의외의 두각을 나타낼 때 쓰인다는 용어, '초보의 행운(beginner's luck)'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제법 흐른 뒤였다. 1988년에 포르투갈어 초판이 나왔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서야 국내 번역판이 출간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다.(Every search begins with beginner's luck. And every search ends with the victor's being severely tested.)' 포르투갈어가 불어로 번역된 걸 다시 국내 프랑스어 전공자가 우리말로 중역(重譯)한 터라 뜻이 좀 모호해진 면이 있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의 소설 속 여정을 생각하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초심자의 행운'을 동력 삼아 시작하고, 결국 온갖 고난과 역경을 다 겪고 나서 단단하게 단련된, '승리자(victor)'의 모습으로 끝난다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의사의 길, 좁게는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의 길에 들어선 초창기, 모든 게 어리숙한 초보 시절,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내게도 어김없이 '초심자의 행운'이 함께 했다. 좋은 선생님과 마음이 통하는 선배, 동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그들이야말로 숙련된 전문의가 될 때까지 이어지는 가혹한 연단의 시간을 꿋꿋이 견디게 해준 내 인생의 선물이었다. '결초보은'할 대상은 그분들인데, 어느덧 ('victor'라 하긴 부족하지만) '시니어' 반열에 오른 나의 시선은 주변의 초보들을 향한다. 우리 과 레지던트라면 현미경 보는 법부터 검사실 경영에 이르기까지, 또 탁구 초보, 골프 초보, 잠수 초보, 커피 초보, 만년필 초보라면 각각 그에 걸맞은 노하우를 총망라하여, 그들이 나중에 '초심자의 행운'이었다고 고백할 이야깃거리 한두 개쯤은 만들어주고 싶다. 사람들이 차 뒷유리에 재미 삼아 붙이고 다니는 '결초보은'의 의미도 점점 그렇게 확대되리라 믿는다. 저마다 다양한 분야의 초보 시절 행운을 기억한다면. 의사신문 홍영준(원자력병원 진단검사의학과) webmaster@doctor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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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1군단 원문보기 글쓴이: 니르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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