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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의 장/여행을 떠나요

[아무튼, 북한산] 너무 드라마틱해…​ 숨은벽의 거친 능선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21. 4. 4.

외로운 능선과 절박한 벼랑들, 그 위로 거친 바람. 능선과 벼랑과 바람이 만나는 지점마다 북한산 숨은벽은 차가운 긴장을 피어 올린다. /사진=헬스조선DB

이상의 단편 소설 ‘날개’의 엔딩은 절창이다.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이는 순간, 겨드랑이가 가렵고 혀끝이 간지럽다. 주인공은 외치려다 만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오랫동안 혀끝에 맴도는 소리가 내게도 있다.

숨자. 숨자. 숨자. 한 번만 더 숨자꾸나.
한 번만 더 숨어 보자꾸나.

◇숨은벽, 그 오랜 무명과 은거
숨고 싶었다. 창피해서, 지쳐서, 꼴 보기 싫어서, 너무 나대고 난 뒤에, 날이 너무 환해서, 후회와 회한에 숨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예외로 두지 않는 과잉 노출의 시대에 숨는 건 쉽지 않다. 숨으면 지고, 잊힐 것 같다. 지고 잊히는 게 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숨으려다 만다. 숨었다가도 금방 튀어 나온다.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북한산의 ‘숨은벽’은 대단하다.

북한산의 '톱3'는 백운대(836m), 인수봉(811m), 만경대(800m)다. 숨은벽 정상 봉우리의 높이는 768m다. 톱3가 으뜸이면, 숨은벽은 버금들 중 수위다. 저 멀리 북한산 남쪽의 랜드마크인 문수봉과 보현봉도 700m를 갓 넘긴다.

예리함과 치솟음의 측면에서 숨은벽은 북한산 전체 봉우리 중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내내 숨어 있었다. 얼마나 숨었으면 이름마저 숨은벽인가. 그나마도 1970년대에 한 산악회가 붙여준 이름이다. 평생을 이름 없이 살다가, 느지막이 얻은 이름이 숨은벽이라니. 그 정도 무명(無名)과 은거(隱居)는 범인(凡人)의 일이 아니다.

◇숱한 벼랑들을 좌우로 흘린 아찔한 능선
백운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도 숨은벽의 존재를 몰랐다. 몇 년 전 지인이 물었다. 숨은벽으로도 가끔 올라? 나는 의아했다. 백운대 오르는 길이란 게 뻔한데…? 우이동 쪽이라면 도선사에서 하루재 넘고 백운산장을 거쳐 위문(백운봉 암문)에 도착해야 한다. 북한산성 입구 쪽이라면 서암문에서 출발해 원효봉 능선을 타든지, 대서문을 통해 계곡을 헤치든지 역시 위문에 들어야 한다. 위문이 그렇게 백운대의 유일 관문인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백운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위문 못 미쳐 왼쪽으로 빠지는 길을 발견했다. ‘밤골’로 향한다는 표지판이 눈에 겨우 띌 만큼 가냘프게 세워져 있다. 혹시…? 바위와 자갈 그득한 길을 내려갔다. 밤골 표지를 따라가다 사기막골 방향으로 갈아타니, 듣도 보도 못한 능선이 펼쳐진다.

산성 넘어 반대편 의상능선의 기기묘묘(奇奇妙妙)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조금은 신경질적이고 거친 듯, 그러나 북한산과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들을 좁은 각도로 한데 모아둔 절경. 그리고 숱한 벼랑을 좌우로 흘린 능선들의 아찔한 전개….

◇잠적과 은거 중에 쌓이는 내공이 있다
잠적과 은거 중에 무시 못 할 내공이 자란다. 주역 64괘 중에 택풍(澤風) 대과(大過)의 형국이 있다. 사람으로 말하면 하체가 부실한 상황, 집으로 빗대면 대들보가 무너질 조짐이다. 파탄과 장기간의 고립이 예상되는 난감한 상황에서 주역은 여덟 글자의 처방을 제시한다.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愍)

혼자 있어도 두려워 마, 숨어 살아도 번민하지 마…. 두려움과 떨림에 지면 은거는 없다. 공포와 번민을 속으로 삭이고 이겨야 제대로 된 은거가 가능하다. 그만한 내공 없는 은거는 자아의 황폐로 이어진다. 끔찍하고 황망해.

그럼, 전설처럼 백운대와 인수봉 뒤에 숨어 태고의 세월을 은거한 숨은벽은 어디에다 자신의 내공을 숨겨뒀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드러내지 않았기에 쌓은 내공을 어느 구석에 감춰뒀을까.

◇능선과 벼랑과 바람이 만나…​
백운산장에서, 위문에서 백운대와 인수봉을 앞에 두고 아무리 살펴봐도 숨은벽은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고개 넘어 북한산성 입구 쪽에서라면 보일까. 보이지 않는다. 구파발 출발을 기준으로 북한산성 입구를 한참 지나 북쪽, 사기막골 부근으로 가야 숨은벽은 예리한 능선을 슬쩍만 비친다.

보이지 않는 숨은벽을 향해 백운대와 인수봉의 틈을 파고든 그날, 절경과 함께 내공을 보았다. 백운대 정상에서 출발해, 밤골, 사기막골 표지판을 따라 가파른 숨은벽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험한 곳이 많아 능선 전부를 타진 못해요!) 뒤를 돌아보았다.

외로운 능선과 절박한 벼랑들, 그 위로 거친 바람…. 능선과 벼랑과 바람이 만나는 지점마다 차가운 긴장이 피어올랐다. 겨울 안개 같은 그 긴장이야말로 오랜 시간 은거를 택한 숨은벽의 내공, 그 흔적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북한산 역사문화관으로 변신을 준비 중인 백운산장에서 북한산 정상 쪽으로 발길을 떼면 바로, 밤골로 빠지는 표지판이 보인다. 가보지 못한 길이다. 지도만 보아선 숨은벽의 존재를 가늠할 수 없는 루트. 그렇게 지도에서도 자신을 감춘 숨은벽을, 이번주에 다시 한 번 만나보려 한다. 나도 한번 쯤 숨을 수 있을까 고민해볼 생각이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4/01/20210401024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