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약처가 희귀암 발생으로 파장이 일고 있는 인공유방물에 대해 '의료기기 재평가'를 진행하고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식약처는 역형성 세포 림프종의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인지했지만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수준에 그쳤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내 환자 발생을 막을 수 있었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2016년 1월 22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실리콘 겔 인공 유방' 8개 제품의 안전성을 재평가 계획을 발표했다. 미용, 유방암 치료 등으로 가슴 수술이 증가하면서 인공유방의 모양변형, 파열 등 부작용에 대한 국회 안팎의 비판이 잇따르면서 안전성을 검증한다는 취지였다. 당시 식약처는 국정감사에서 '실리콘 겔 인공 유방' 부작용 건수로 뭇매를 맞았다.
그로부터 1년 5개월 뒤인 지난 2017년 6월, 식약처는 '실리콘 겔 인공 유방' 사용 시의 주의사항 등을 추가하는 내용의 재평가 결과를 공고했다. 실리콘겔인공유방 수술 후 3년이 되면 자기공명영상(MRI)으로 파열여부를 확인하고, 2년 주기로 파열 여부 검사를 받을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실리콘겔인공유방 이식 여성의 경우 모유 수유 전 파열 여부를 진단받도록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식약처의 이 같은 인공유방 보형물에 대한 재평가에 최근 회수가 결정된 엘러간사의 거친표면(텍스처드) 인공유방 보형물(수허 07-634호)이 최우선 순위에 있었다는 것.
당시 식약처 관계자들은 역형성 세포 림프종(BIA-ALCL)의 발병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인식했다.
27일 팜뉴스가 입수한 당시 '재평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식약처는 한국엘러간사의 인공유방에 대해 '림프종 및 역형성대세포 림프종(ALCL)'이라는 기존의 허가 내용을 '림프종 및 유방보형물 관련 역형성대세포림프종(BIA-ALCL)'으로 변경했다.
특히 "유방보형물 관련 BIA-ALCL은 매우 희귀한 질병이며, 인공유방을 삽입한 여성과 삽입하지 않은 여성 모두에게서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유방보형물 관련'이란 키워드를 삽입해 BIA-ALCL과 유방보형물의 인과관계를 더욱 분명히 암시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식약처는 BIA-ALCL 발병 가능성에 대한 사용시 주의사항 등을 새롭게 포함시켰다.
보고서는 "인공유방 시술 여성은 인공유방에 인접한 체액이나 흉터 피막에 유방보형물 관련 BIA-ALCL을 생성할 위험은 매우 적지만 증가할 수 있다"며 "엘러간 및 다른 제조원의 인공유방을 포함한 인공유방 삽입 이력이 있는 환자에서 유방보형물 관련 BIA-ALCL 발병 사레가 전 세계적으로 보고됐다"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에선 BIA-ALCL의 의심증상인 '장액종'과 '구형구축' 관련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장액종은 복부 수술 후 나타나는 합병증으로 장액과 림프액이 고여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형구축은 가슴 확대 수술 뒤 보형물 주변에 생긴 막이 두꺼워지면서 일어난 수축 현상으로 가슴이 딱딱해지거나 모형 변형이 생기는 것이다.
보고서는 "뒤늦게 발생한 장액종을 가진 환자의 경우 유방보형물 관련 BIA-ALCL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환자들이 구형구축 또는 인공유방에 인접한 종괴를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식약처가 BIA-ALCL 발병 가능성에 대한 앞선 내용들을 전부 '사용시 주의사항'을 추가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식약처의 안일한 대응을 꼬집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사는 "식약처가 2년 전 이정도까지 검토를 했으면 환자등록 연구를 시작하거나 대국민 안전성 홍보를 했어야 했다"며 "좀 더 보수적으로 안전성 평가를 했다면, 국내에서 이렇게까지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재평가 결과 보고서에는 '거친(textured) 표면을 가진 인공유방'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보고서는 "거친 표면을 가진 인공유방은 매끄러운(smooth) 표면의 인공유방보다 이식 후 유방보형물 관련 BIA-ALCL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 한다는 보고가 있다"며 "의료인들은 대부분의 유방보형물 관련 BIA-ALCL 확진 사례는 거친 표면의 인공유방에서 발생하였음을 주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식약처는 보고서를 통해 이미 2년 전에 거친 표면과 BIA-ALCL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면서 환자와 의료진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용시 주의사항을 추가한 것이다. 바로 일각에서 식약처를 향한 질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최근 장액종 증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 A 씨는 "만약 이런 내용을 알았다면 거친 표면 유방으로 교체 수술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식약처가 재평가를 통해 인공 유방 보형물을 전부 회수하거나 허가 취소를 하지 않았던 점이 너무 화가 난다. 재평가를 해도 적극적인 조치가 나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위해서 진행했나"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식약처의 입장은 다르다. 당시 재평가를 위한 전문가 회의에 수차례 참여한 전문의는 "2017년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환자는 나오지 않았다. 미국 호주에서 백인 환자들만 발생한 상태였다"며 "10만 명당 한명의 확률이었다. 지금과 데이터가 전혀 다르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BIA-ALCL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재평가 회의에서도 허가 취소나 회수 조치 얘기는 아예 나오지 않았다"며 "FDA에서 BIA-ALCL 관련 공문을 받은 이후 사용시 주의사항을 추가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팜뉴스 최선재 기자 remember2413@pharmnews.com
출처 : http://health.chosun.com/news/dailynews_view.jsp?mn_idx=322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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