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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그밖의 중요 질병

[스크랩] 거울 속 양면(兩面)의 모습이 화해하면 `치매`는 인생 끝 아닌 그냥 병일 뿐입니다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14. 10. 29.

내 집에 앉아 있던 동안 내내 어머니는 당신의 짝 바뀐 양말만을 만지작거리고 계셨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변기의 물을 내리지 않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뒤에는 냉장고 문을 닫지 않으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머니가 잃어버리고 있는 습관적인 기억들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고 있었다. (중략) 잊혀지는 것, 그것이 지나간 시절의 희망이거나 현재를 짓누르는 절망과 같은 것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지.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것도 잊지 않고 계셨다. 고작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양말은 반드시 제 짝을 맞춰 신어야 한다는 사실,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김인숙의 소설 《거울에 관한 이야기》에선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세 차례 유산한 적이 있는 딸이 만나 주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이야기 사이 사이 어머니의 ‘거울’에 관한 기억과 생각들을 주섬주섬 채워 간다.

거울은 갑자기 전보다 더 투명해지고 더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이미 늙어 가고 있던 주인을 새로 만나, 십 년 넘게 그 주인의 얼굴을 지켜보아 온 거울이었다. 그 거울의 번쩍이는 광채는 주인의 마지막까지도 지켜보겠다는 듯이 맑고 투명하고 또 속이 깊었다. (중략) 어머니가 거울을 깨는 바람에 큰일이 날 뻔했었다는 소식을 올케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어느 날 바뀐 양말을 신고 내 집에 다니러 오셨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일러스트=유사라)
(일러스트=유사라)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힘주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룸미러 속에는 다시 어머니의 모습만이 보였다. 어머니는 차들이 씽씽 달리는 거리한복판의 건널목 앞에 서 계셨다. 그러면서 윤희는 “옛날에 어떤 사람이 거울의 뒷면을 보고 자기 얼굴이 안 보인다고 미쳐 버렸대요”라고 엄마에게 얘기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나는 어머니가 거울의 앞면을 통해, 저쪽 거울의 뒷면까지 걸어가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울의 앞면과 뒷면 사이 그 사이에는 더 이상 건널목이 아닌 강물이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이것으로 ‘거울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거울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진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지만,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는 환상이다. 거울 속의 오른손은 거울 앞에 선 사람의 왼손이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히지만, 이는 거울이 꾸미는 눈속임일 수 있다. 눈속임, 아니면 착각일까. 시몬느 베이유는 “아름다운 여인은 거울을 보고 자신이 바로 그 모습 자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못생긴 여인은 그게 다가 아니란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거울의 양면성을 얘기한다. 하지만 결국 거울의 양면성에서 비롯되는 착각은 거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자아내는 결과다. 거울을 보고 있는 그 순간의 마음새에 따라 예쁘게 또는 밉게, 멋지게 또는 열등하게 내가 보는 것이지 거울이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거울은 그저 비추인 것을 반사할 뿐이다.

질병과 나의 관계 역시 다르지 않다. 질병이 나에게 주는 생의 약함과 삶의 유한이라는 두 가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사람마다 병마다 그 상태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끝’을 먼저 생각할 것이고 다른 이는 겸손한 자세로 새삼 감사하고 진지한 하루하루를 꾸려가고자 할 것이다. 특히 치매의 경우 치료를 해야 하는 ‘질병’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인생의 끝’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문학 속에 등장하는 치매는 ‘질병이고, 망각의 상징이며, 또한 반성의 서사다(<현대소설에 나타난 치매> 김은정)’. 물론 치매는 성격 변화, 가족 해체를 가져올 수 있다. 망각의 상징으로선 기억과 함께 정체성도 사라진다. 하지만 이를 인생의 끝으로 절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제 저녁, 친구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문상간 영안실에서 나는 내 어머니를 생각했었다. 돌아가신 친구 어머니에게 치매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쩌자고 그렇게 가슴을 막막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었는데도 나는 친구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치매 환자인 친구 어머니가 길을 잃어버리고 거리에 서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곧 친구 어머니의 모습이 내 어머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내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다. 주인공은 돌아가신 친구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치매의 특징은 최근의 기억은 스러지고 과거의 기억은 대체로 고스란하다. 어머니는 치매로 ‘옛날의 딸’로 돌아간다. 역할이 바뀐다. 소설 속의 ‘어머니’를 ‘나’라는 단어로 바꾸어 읽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딸은 거울 앞에 서서 우물거린다. 어머니가 자신의 거울
이다.

20세기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용서와 약속은 인간 행위의 고유성”이라고 말한다. 둘 다 관계성이 핵심이다. 그리고 둘 다 관계의 회복을 구하는 행위이며, 사실과 진실에 대한 인식이 바탕이 된다. 거울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한다. 환상의 허구성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사람이 가장 그럴싸하게 사실과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중의 하나는 거울 앞에 서는 일이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 그리고 어머니의 인지능력을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진실의 기억을 은폐하기 위해 ‘덮개 기억’을 만든다. 즉, 과거의 사건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 기억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자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과거의 기억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과 인접돼 있는 사항들을 연상해 기억하는 것이어서 항상 조작된다. 기억하기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덮고 대신에 평범하고 의미 없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기억하는 게 덮개 기억이다.

치매는, 가족은 힘들지만 자신은 가장 행복한 질병이라고 말한다. 이는 치매 환자가 자신을 덮개 기억 속에 가두기 때문이다. 치매 환자는 거울의 양면성 중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놓은 왜곡된 상만을 본다. 하지만 그런 치매환자를 바라보는 가족들은 거울이 보여주는 진실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 사이에 생기는 커다란 차이-거울의 앞면과 뒷면 사이의 건널목-를 출렁이는 강물로 메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상이 서로 화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치매는 더 이상 우리의 삶에 두렵기만 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치매와 친해져야 치매를 인생의 끝이 아닌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나와 현실 속의 나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이 둘 사이에 놓인 건널목에 출렁이는 강물을 채워 넣으면 그때부터 치매는 인생의 끝이 아닌 치료가 가능한 질병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거리 좁힘을 얘기하고 있다."



	유형준 교수
유형준 교수

<유형준 한림대강남성심병원 내과 교수>
‘유담’이라는 필명으로 시인과 수필가로 활동한다.
한국의사시인회 회장, 함춘문예회회장, 쉼표문학회 고문, 문학의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문학 속에 담긴 건강 이야기를 고찰한다.






/ 기고자: 유형준
월간헬스조선 10월호(128페이지)에 실린 기사임

출처 : 암정복 그날까지
글쓴이 : 정운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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