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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감포토 | 그때 그 시절] 올림픽의 꽃, 마라톤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14.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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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42.195km의 도전! 마라톤은 하계 올림픽 종목 중 최고 인기종목으로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해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전국 곳곳에서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는데요. 일반 시민들의 생활 스포츠로 자리 잡아 건강을 위해 단거리 마라톤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마라톤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열풍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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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 아픔 속에서 성장!


 

  ▲ 1957. 보스톤 마라톤대회 참가선수단의 귀국(좌), 1958. 도쿄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선수단의 귀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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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우리나라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바로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과 시상식 장면이었는데요. 일장기를 단 채 시상대 위에 선 우울한 표정의 손기정 선수의 모습은 일제 강점기, 탄압받던 우리 민족을 단결시켜준 명장면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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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마라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게 되었는데요. 광복 후 조선육상연맹이 조직되었고, 1947년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서윤복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여 금메달의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꾸준히 성장해온 우리나라 마라톤의 수준은 1950년 보스톤 마라톤대회에서는 1, 2, 3위를 나란히 차지하며 실력을 과시하였고,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에서는 이창훈 선수가 우승하며 한 때 식민지배를 받았던 설움을 일거에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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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마라톤의 침체기


 

▲ ?1965. 경춘간 마라톤대회(좌), 1975. 제 46회 동아마라톤 대회(우)

      

?한동안 최정상급을 유지했던 우리나라의 마라톤은 60년대부터 20여 년간 암흑기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제 무대에는 과학적인 훈련과 관리로 무장한 해외 선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요. 대표적인 인물로 1960년 1964년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맨발의 아베베’의 아베베 비킬라 선수가 있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선배들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세계무대에 도전했지만 성적은 부진했고, 1974년 문흥주 선수가 세운 2시간 16분 15초의 한국 기록은 10여 년간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준 마라톤 선수들 덕분에 우리나라의 마라톤은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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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 번 정상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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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 제 1회 서울 국제마라톤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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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강국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82년 제 1회 서울 국제마라톤대회가 개최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국제 마라톤 대회입니다. 이 같은 마라톤 중흥의 노력 끝에 마침내 이홍열, 채홍락 선수가 1984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며 10년 만에 한국 마라톤의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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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2시간 8분 대의 벽을 깬 것은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였습니다. 황영조 선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직전 일본 벳푸국제마라톤대회에서 한국 마라토너로는 처음으로 2분 8초대의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은메달을 획득하고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에 이어 다시 한 번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황영조, 이봉주 선수 이후 우리나라의 마라톤은 국제무대의 중심에서 조금 멀어져 있는데요. 다시 한 번 세계인들과 견줄 만한 기록을 뽐내줄 선수가 등장하길 기원해봅니다.

 

 



 


 

출처 : 정책공감 - 소통하는 정부대표 블로그
글쓴이 : 정책공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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