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을 잃는다는 것, 죽음보다 깊은 상실
가슴을 잃는다는 것은 여자에게는 엄엄청난 상실이다. 수술을 받은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이 죽음을 맞는 심정이 된다.
물론 생리적인 측면에서 여성을 대표하는 신체기관은 자궁과 난소다. 여성을 여성답게 하는 에스트로겐과 같은 성호르몬이 분비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옷을 입을 때도, 거리를 걸을 때도, 목욕탕에 갈 때도, 가슴이 허전한 것이 배 속이 허전한 것보다 더 눈에 띈다.
유방절제술을 받은 여성의 70% 이상이 여성성이 손실됐다고 느끼며, 80% 이상이 유방이 없는 것을 장애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더구나 약물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병행할 경우,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가 나빠지는 등 외모에 대한 급격한 변화가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남편이나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성적인 관심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심리적으로 타격을 입은 여성들의 삶의 질이 엉망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상실은 괴로움이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허전하고 휑하다. 상실을 맞이하는 인간의 최초 반응은 ‘부정’이다. ‘그럴 리 없어’라는 반응이다. 가슴이 없어진 사실을 받아드릴 수가 없다. 이런 부정의 정신방어기전은 때로는 ‘환상유방증후군(Phantom Breast Syndrome)’과 같은 증상을 만들기도 한다. 가슴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느낀다. 심리적으로 유방 상실에 대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통증, 가려움증, 성적 흥분, 그리고 생리 전에는 생리통을 앓기도 한다. 유방절제술을 받은 환자의 반 수 이상이 느낀다고 한다.
다음은 ‘분노’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라는 반응이다. 자신의 가슴을 잃게 한 의사, 보호자 혹은 스스로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낀다. 그래서 자학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다음 단계로 ‘타협’을 한다. 이제는 유방과 관련된 추억과 일종의 유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예쁜 브래지어나 가슴이 드러나는 의상을 정리한다. 외적 상실과 내적 상실이 만나는 접점과도 같다.
다음 단계는 ‘우울’이다. 이때가 가장 위험하다. 자칫 치료를 포기하거나 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가능성이 높은 단계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차라리 없어지길 바라기도 한다. 혹시 여성성을 잃어버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한다.
마지막 단계는 ‘수용’이다. 자신의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상실로 인한 애도의 과정이 정리되는 단계다. 이때가 되어야 안정을 찾고, 바뀐 몸과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 5단계의 애도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단계가 혼재되기도 한다.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단계가 와야, 비로소 안정된 마음과 몸으로 새롭게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겠지만, 너무 빨리 도달하기 위해 무리하는 것도 좋지 않다. 무릇 애도란 어느 정도 아프고 힘들어야 한다. 그래야 더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방 상실 후 우울증
유방을 잃었다는 상실감에서 오는 우울증은 생각보다 충격이 엄청나다. 일시적인 불면증이나 불안과 달리, 병의 경과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병 치료를 포기할 정도로 악화되기도 한다. 현숙씨(가명)의 경우가 그렇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를 둔 40대 중반의 현숙씨는 전형적인 주부다.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외모도 곱고 붙임성도 있어 친구도 제법 많다. 아이들에게 헌신적이며, 금술이 좋기로 소문이 난 잉꼬부부였다.
그러던 그녀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1년 전 어느 날 백화점 문화센터의 건강 강좌를 듣게 되면서부터다. 유방암 관련 강의에서 자가진단법을 실습하던 중이었다. “혹시 뭐가 잡히시는 분, 멍울이 만져지는 분, 계세요?”라는 강사의 질문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왼쪽 유방 바깥부분에서 꺼칠꺼칠한 녹두알만 한 멍울이 만져진 것이다. 그 길로 병원을 찾은 그녀에게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초음파 검사와 조직생검 결과는 악성이었다. 다행히 조기에 발견해 유방절제술로 완치가 됐다. 종양을 발견하고도, 악성이라고 확진을 받고도, 수술만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는 권유를 듣고도 현숙씨는 잘 버텨냈다. 힘든 수술을 받을 때도, 회복이 되어 퇴원을 했을 때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집에 와서 일주일 정도 흘렀을까,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남편에게는 다른 방을 쓰자고 우겨댔고 방 안에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약물 복용을 중단했다. ‘좀 있으면 좋아지겠지’ 하고 기다리던 가족들은, 그녀의 치료 거부에 놀라 필자의 상담실을 찾았다.
“그냥 다 싫어요. 모두 나를 괴물 보듯 해요. 비웃는다고요.” 상담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피해의식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남들이 나를 비웃어요”라는 말은 ‘남들이 나를 비웃을까봐 두려워요’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유방절제술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이제 나는 여자도 아니에요. 남편이 나를 피해요. 혹시 딴 여자가….” 부부는 수술 전에 성생활이 행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생각에는, 지금 남편이 자신을 피한다는 것이다. 반면 남편의 입장은 이렇다. 큰 수술을 하고, 눈에 띄게 몸 상태가 안 좋아졌는데,
어떻게 관계를 요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딴에는 아내를 위하는 마음에 피해주었던 것인데,
그런 남편을 곧 바람피울 난봉꾼으로 모니 어이없어했다. 피해의식이 심한 중증 우울증인 그녀에게 우울증 치료제를 처방했다. 처음에는 “항암치료도 안 받는 내가 무슨 약을 먹겠느냐”며 완강히 버텼지만, 남편과 아이들의 설득으로 투약을 시작했다. 지속적인 상담치료와 함께 2, 3주가 지나자 그녀의 우울증은 눈에 띄게 호전되어,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5, 6주가 지나자 부부관계에서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제 우울증은 거의 나았지만, 재발 위험성 때문에 소량의 약물과 정기적인 상담을 받는 그녀가 며칠 전 상담을 받으러 왔다.
“선생님! 저 유방 성형해요. 성형수술은 연예인이나 하는 사치인 줄 알았는데…. 아주 예쁘게 해달라고 할 거예요. 암도 이겼는데, 그 정도 상은 받을 만하지 않아요?”
치료 초기부터 유방 성형수술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수술받기를 완강히 거부하던 그녀가 변했다. 치욕처럼 느끼던 유방 성형을 ‘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유방암 수술 후 우울증이 잘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은 상실감이 가장 큰 이유다. 여성성이 사라지고, 성적 매력도 없어지며, 장애인이 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주위의 도움이 절실하다. 두 번째는 항암치료 중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호르몬에 관여하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발생하거나, 치료 후 발생하는 탈모나 식욕부진, 피로 등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암을 치료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치료이므로, 절대 우울하다고 피해서는 안 된다. 적절히 우울증 치료만 받으면 오히려 쉽게 완치될 수 있다. 치료는 일반 우울증 치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약물치료와 함께, 변화된 신체에 대해 수용하는 마음을 갖도록 상담이 필요하다.
가족들의 자세
가족, 특히 남편의 지지는 다른 어떤 치료보다 효과적이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우자를 아끼는 것이 의사의 몇 마디 말보다 중요하다.
가족들이 우선 해야 할 일은, 가슴을 잃은 여자를 이해하는 일이다. 여자가 가슴을 잃는 것은, 남자의 입장에서는 ‘거세(去勢)’를 당한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니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간혹 암 진단 사실을 본인에게 알려주어야 할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가족들이 있다. 환자 당사자가 받을 충격에 대한 걱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 가족 스스로가 힘들어서이기도 하다. 가족 중 환자가 가장 믿는 사람이 솔직히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다. 가능한 한 의사와 함께 병이 미치는 영향, 앞으로의 치료 계획, 예후, 수술 후 관리 등을 상세히 알려야 한다. 환자가 스스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혹 심리적으로 극도의 불안을 보이는 경우라면, 전체 치료의 관점에서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외국의 경우에는 유방암 환자는 물론이고 다른 암 환자들에게 정신과적 치료를 병행하도록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환자와 가족들의 삶의 질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치료에 대해 적극적이 되어 병의 호전이 빨라지고 재발이 줄고 생존 확률이 늘어난다.
만약 어린 자녀들이 있다면 엄마의 병에 대해 설명하고 수술 전후의 변화에 대해 사실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 혹시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이라면, 충분한 시간 간격을 두고 하나씩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남편의 입장에서도 가능한 한 솔직히 대했으면 한다. 어차피 벌어진 불행이라면 수습이 필요한 것이지, 부정과 회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이야기해야 한다.
물론, 상대를 공격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어차피 건강한 아내를 두었어도 존중을 하지 않는다면 부부 사이가 원만할 수는 없다. 상식적인 선에서 감정을 표현한다면 아내도 잘 받아들이고 부부 생활에 보다 빨리 적응을 할 것이다.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 오히려 남편들은 덤덤히 받아들이는 반면 당사자인 아내들의 걱정이 더 많다. 그러니 아내도 자신의 마음을 남편에게 솔직히 고백하고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패배자가 아닌 암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영웅
전쟁터에는 영웅이 있다. 영웅의 얼굴이나 다리, 가슴에는 전쟁의 흔적이 있다. 용감하게 싸우다 입은, 훈장보다 값진 부상이다. 하지만 패배자에게도 똑같은 부상이 있다. 패배자에게는 그 부상은 치욕이며 고통이다.
암은 지독히 무서운 놈이다. 환자는 물론이고 의사에게도 암은 가장 치열한 생존의 전쟁터이다. 다행히 유방암은 조기에 발견하면 거의 대부분 완치되는 병이다. 일찍 발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피하지 않고 용감히 그놈과 맞서 싸우면, 승리는 당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유방암을 앓게 된다면, 잊지 말기를 바란다. 당신 가슴에 남을 상처는 치욕이나 고통이 아니다.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영웅에게 주는 값진 훈장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한다.
'종류별 암 > 유방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유방암 유전자, 줄기세포 과잉생산 (0) | 2009.12.29 |
---|---|
[스크랩]유방조직에 특정면역세포 많으면 유방암 위험 (0) | 2009.12.28 |
[유방암]유방암 '진실 혹은 거짓' (0) | 2009.12.28 |
(스크랩)천천히 자라는 유방암 늘어나 (0) | 2009.12.25 |
(스크랩)김상민 셰프가 제안하는 유방암 환우들을 위한 요리법 (0) | 2009.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