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에게 권하는 마음가짐..
전 서울대병원장 한만청 박사의 암투병기
“암을 친구로 삼았다가 잘 돌려보냈습니다.”
어른 주먹보다 큰 간암 덩어리를 장시간의 수술 끝에 성공적으로 잘라 냈지만, 두달 만에 폐로 전이.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항암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간암을 퇴치한 지 3년 째.
서울대병원장을 지낸 한만청(67) 박사가 암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간암과의 투병기를 담아 책으로 냈다. 책 제목이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이다.
한 박사의 암 투병은 아이러니의 연속이었다. 서울대 병원장 시절 ‘환자 중심 병원으로의 개혁’을 이끌었던 그는 암환자로서 4년여 동안 병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간암 등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유명한 방사선과 의사였던 그에게 간암이 찾아온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간암이 처음 발견된 것도 우연이었다. 97년 병원장 시절 자신의 주도로 문을 연 서울대병원 건강검진센터를 방문하던 중, “원장님이 만든 곳에서 건강검진 한번 받아 보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고 간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거기서 1㎝짜리 간암이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 정도는 쉽게 치료할 수 있었으니까요.” 당시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고농도의 알콜을 간암에 주사로 직접 찔러넣어 암세포를 죽이는 ‘경피에탄올 치료법’을 시행했다. 그 후 몇 차례 검사에서 간암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개월 후에 시행한 복부 컴퓨터촬영 사진이 판독대에 올라 오는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 우측에 14㎝나 되는 암덩어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끝났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치료했던 간암 환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큰 암 덩어리는 보기 드물었습니다.”
이때부터 한 박사의 고민은 시작됐다. ‘수술을 해야 하나’ ‘한다면 어디서 해야 하나’ 등등.
“수술을 서울대병원에서 받지 않겠다.”
서울대병원장을 역임한 그의 이 ‘선언’은 당시 의료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병원, 그것도 모든 편의를 누릴 수 있는 모교 병원을 놔두고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한 걸까.
“매일 간암 환자만 수술해도 실력을 제대로 쌓기 어려운 데, 당시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어제는 위 수술, 오늘은 간 수술, 내일은 대장 수술을 하는 형편이었죠. 그래서 간 수술만 전문으로 하는 국내 J병원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을 앞두고 체면 따질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한 박사는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곧바로 꼭 해야 할 일로 ‘환자 자신이 암 박사가 돼라’는 것과 함께 ‘좋은 의사를 선택하라’는 것을 꼽는다. 괜히 권위만 앞세워 “나만 믿고 잘 따르면 되지 왜 이렇게 질문이 많아”라는 식의 ‘유명의사’보다는 잘 모르면 공부를 해서라도 환자와 함께 대화하려는 의사를 고르라는 것이 한 박사의 충고이다. 그래도 환자의 편의와 의사의 실력 중 무게 중심은 의사의 실력에 둬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간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 박사 자신도 그것으로 치료는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두달 후 간암이 폐로 전이됐다는 진단이 또 나왔다. 이 경우 간암 4기, 즉 말기에 해당되며, 기존의 항암치료가 성공할 확률은 5% 밖에 안된다.
“그때는 정말 마음이 흔들렸어요. 삶을 갈망하는 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점점 커갔죠.”
이번에는 다시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항암치료는 서울대병원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두달 동안의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70㎏이 넘던 몸무게가 50㎏까지 빠졌다. 친지들은 그가 옆에 있어도 몰라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왜 암과 싸워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암은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결국 ‘그래, 우리 함께 사는 동안만이라도 잘 지내보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 후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항암치료 도중 음식 냄새에 구역질이 치미는 날이면 “이 친구 오늘은 유난히 더 악동처럼 구는군. 그러지 말고 조금이라도 먹게 해주지”라며 암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항암 치료를 끝낸 지 3년째. 떠난 ‘친구’는 더 이상 그를 찾아오지 않고 있다. 이제는 “그 때 그 친구와 잘 지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웃으며 말한다.
“암과 싸우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어떤 싸움이든 싸움은 분노를 유발하고 스스로를 소모시킵니다. 암이 강하게 부딪쳐올수록 보듬어 안고 그 친구를 언젠가는 꼭 돌려보내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면 좋은 치료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사들 사이에는 ‘환자 중에 제일 피곤한 환자가 의사’라는 말이 있다. 의사들은 환자가 돼도 자신의 지식을 토대로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간암 전문의인 한 박사의 투병 과정은 어땠을까.
“일단 의사를 선택했으면 무조건 그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그러면 점차 마음이 흔들려 그릇된 치료법에 눈을 돌리게 되죠. 결국 완치와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될 뿐입니다.”
그는 투병 과정에서 왜 이런 약을 쓰는 지, 뭐 하려고 저런 검사를 하는 지 등을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환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환자들이 치료 내역과 병의 상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환자 자신이 병의 주체이자 치료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에게 모든 걸 의존하는 소극적인 자세로 치료에 임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투병 생활 중에도 후학을 위해 간암 등 동양인에게 흔한 질환을 방사선의학으로 치료하는 최신 기법 등을 망라한 의학교과서를 틈틈이 집필했다. 그가 펴낸 영문판 ‘중재적 방사선과학(Interventional Radiology)’은 미국 방사선학회지의 서평에서 ‘의사의 필독서’라는 극찬을 받았다.
■한만청 박사가 권하는 ‘암과 친구가 되는 5가지 원칙’
1. 사귀기 전에 충분히 알자
암은 고약한 친구다. 암을 어떻게 달래면 성질이 조금 가라앉는 지를 환자가 잘 알아야 한다. 암 등에 대한 의학서적을 읽고 이를 주치의와 대화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다. ‘~하더라’ 식의 정보에는 차라리 귀를 막아라.
2. 수치에 일희일비 하지 마라
실험은 사람을 속인다. 현대의학은 모든 걸 수치화하며, 그것은 매일매일 변할 수 있다. 여기에 흔들리면 우왕좌왕하게 되고 체력만 낭비한다. 암이란 놈은 상황에 따라 줏대없이 다른 얼굴을 보이는 상대를 싫어하며, 워낙 뛰어다니는 걸 좋아하므로 함께 지내려면 든든한 체력이 있어야 한다.
3. 잔수로 사귀지 마라
암과 지내는 것은 마라톤 레이스와 같다. 암 치료법들은 대부분 오랜 기간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단번에 어떻게 해보려는 요령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4. 거리를 두고 차분히 사귀라
암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져라. 자신을 먼저 다진 후 암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암은 내 약점을 이용하기 때문에 함부로 덤벼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5. 언젠가는 돌려보낼 수 있는 친구라고 여겨라
암과 더불어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마라. 암은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지만 언젠가 되돌아갈 친구다. 그 이후를 생각해야 암도 ‘아, 이 놈은 내가 오래 붙어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고 판단해 물러갈 준비를 한다.
출처;암과 싸우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