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김희영 님'은 진료실에서 됐던 여러 환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한 가상의 인물이며, 특정 인물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김희영 님, 안녕하세요?
오늘 오전 진료실에서 인사드렸던 신준성입니다.
김희영 님이 불편한 표정으로 제 외래 진료실에 처음 오신 날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진료 기록을 살펴보니 벌써 두 번의 계절이 지났더군요. 종양내과 교수님 소개로 처음 진료실에 오신 날, 불편한 점을 묻는 제 질문에 '제가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할 정도인가요?'라며 반문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보름마다 입원해 항암치료받는 것만 해도 진이 빠지는데, 새로운 의사를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이 버거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정신종양학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진료 분야가 낯서셨을 것 같습니다.
첫 진료 때 말씀드렸듯 저는 암 환자가 겪는 정신적 어려움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야를 공부하는 연유로 김희영 님의 치료 여정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지난 겨울 외래로 처음 찾아오신 날, 김희영 님은 이미 긴 항암치료로 많이 지쳐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항암치료 동의서를 작성하면서 설명 들었던 갖가지 증상들이 몸으로 나타나 달라져 버린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하던 그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평생을 이어갈 것이라 믿었던 소중한 직업까지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인해 내려놓아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나의 몸, 나의 일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좌절과 우울감을 불러일으킬지,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워 쉽게 대답해드리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오늘 이 편지에 담아봅니다.
사실 이 글은 김희영 님께 의사로서 드리는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언제인가 정신 없이 진행되는 내과 외래에서 이미 마음을 많이 다치셨다고 말씀하셨지요. 암 치료를 맡고 계신 선생님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환자들을 위해 애쓰고 고민하는 걸 알기에 그러한 경험을 하시게 되는 현실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동시에 암 치료를 받는 분들이 정신적으로도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 저희 의사들이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했습니다.
암을 앓으시는 분들의 일상은 치료와 회복, 인내와 고통의 순환이고, 그 사이사이를 불안과 희망, 우울과 좌절이 채우고 있으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치료가 끝나고 얼마간은 내 몸 안에 '암'이라는 존재가 없다는 듯 엄마로서, 남편으로서 일상에 집중해 보겠노라 다짐하지만, 불현듯 다음 외래와 CT 검사 일정이 떠오를 때면, 그리고 그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올 때면,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이 좋아졌다며, 약 없이도 잘 잤다며 환히 웃으시던 지난봄의 김희영 님이, CT 검사 소견을 듣고 주체할 수 없는 불안 때문에 한숨도 잘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오늘의 김희영 님과 같은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 봅니다.
암을 앓고 있는 분들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암 자체가 주는 무게에, 치료 과정에서 동반되는 통증과 기분 변화, 식욕 부진과 불면 같은 증상이 더해져서 때로는 암 치료를 이어갈 용기마저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암 치료 과정에서 겪는 여러 부작용을 덜어내기 위해 여러 의료진의 도움을 받듯, 정신적인 어려움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저는 김희영 님이 제게 진료받는 시간만이라도 암이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암 환자'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치료하는 분'에게 암이 있는 것이라 여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암과 마음을 완전히 떼어내어 생각할 수는 없기에, 치료에 지쳐있는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고통스러운 증상들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방법들을 고민합니다. 현대 의학이 아직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한 증상을 겪으실 때는, 의료진들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에 단 몇 분이라도 더 이야기를 들어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김희영 님은 혼자 힘으로 신발조차 신기 어려워진 자신을 돌아보며, "이제는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치료를 이어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차라리 빨리 삶을 정리하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그러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겪어온 과정은 모두가 다르겠지만, 암을 가진 10명 중 9명은 자살을 생각해 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암 환자들이 자살로 삶을 마치는지 자세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 사례들을 살펴보면 그 수가 암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두 배나 높다고 하지요.
김희영 님께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조용히 죽고싶다는 말을 했을 때, 침묵을 지켰던 몇 초간 제 마음 속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에게 '자살'이란 촌각을 다투는 응급상황이기에 김희영 님을 보호하기 위해 바로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잠시 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 뒤에 숨어있는 김희영 님의 어려운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기에, 조금 더 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희영 님의 마음 속에도 그런 여러 생각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을까요. 이야기의 주제는 어느새 나이를 많이 먹은 반려견으로 옮겨가, 그 녀석보다 하루라도 더 살려면 열심히 버텨야겠다는 내용으로 이어졌습니다.
김희영 님처럼 혼란스러운 마음을 붙잡고 자살과 삶을 저울질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암 환자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 하는 일들이 하나둘 늘어갈 때, 내가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게 아닐지 걱정하고 스스로 존재 이유를 의심하게 됐다는 말이 참 가슴 아팠습니다. 김희영 님이 삶을 이어가야 할 이유는, 김희영 님이 할 수 있는 '일'과 '역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김희영 님이 끝끝내 살아온 '이야기' 속에 있다고 감히 말씀드려 봅니다. 암이 김희영 님의 일상을 흔들더라도, 김희영 님이 살아오신 삶의 궤적과 용기 있게 이어온 치료의 여정을 지워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사 의학(narrative medicine)'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료 현장에서의 '이야기'를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그동안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의사가 독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서사 의학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의대생 시절, 실습 나갔었던 호스피스 병원에서 주치의 선생님이 맡기신 첫 번째 일이 환자분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투여받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이어갔던 한 어르신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제게 찾아오신 시간 동안, 김희영 님이 만들어온 삶의 순간들을 이야기로 꿰어내실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용기 있게 살아오신 나날들을 이야기로 엮어내는 경험이 삶을 긍정하고, 어두운 감정을 잠시나마 덜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특이할 것 없는 이야기더라도, 김희영 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울림이 되고, 또 스스로에게는 삶을 이어갈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미심쩍어 보이는 제 말을 믿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작은 진료실에서 김희영 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힘겨운 일상속에서도 용기 있게 삶의 끈을 잡고 나아가는 그 이야기가, 환자들의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배우고 있는 젊은 의사에게 귀한 울림을 줬기 때문입니다. 물론 너무 힘들 때는 잠시 멈추어야 할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리고 삶의 끈을 놓고 '자살'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는 억지로라도 진료실로 오셔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조금은 서툴더라도 김희영 님과 함께 고민하겠습니다. 오늘도 제 진료실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외래에서 오늘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서 들려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준성 올림.
[본 자살 예방 캠페인은 보건복지부 및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대한정신건강재단·헬스조선이 함께합니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4/11/01/20241101016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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