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 예술을 만나면>
통증 조절에 어려움을 겪으며 입원한 70대 후반의 환자분이 계셨습니다. 암 투병 중임에도 큰 키와 꼿꼿한 허리, 힘 있는 목소리 덕에 통증으로 힘들어 하는 분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환자분의 이런 외모는 금세 병동의 다른 분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이 분은 종종 휴게실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어떻게 암 진단 이후에도 강한 정신력으로 일상을 철저하게 지켰는지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젊은 시절 복싱과 유도를 오래 한 체육인이었고 40대 이후에는 동네에서 직원을 여럿 둔 태권도학원을 크게 운영했던 경험도 즐겁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환자분은 병원과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로 통증 조절을 위해 투여되는 진통제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치의가 와서 설명하고 약사가 와서 설득해도 환자분은 두 눈을 감고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내 병은 내가 제일 잘 압니다”하고는 진통제를 거부하였습니다. 통증 때문에 입원했으면서도 진통제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했습니다. 보호자분들은 “아빠의 저 고집이 또 시작됐다” “평생 저렇게 고집스럽더니 암에 걸리고도 우릴 속상하게 한다”며 답답함을 호소했습니다. 환자분은 낮 시간에는 제법 잘 지내셨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간호사 선생님께 전해들은 바로는 밤에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잘 정도록 큰 어려움을 겪고 계셨습니다. 환자분은 미술치료사인 제가 제안한 것을 그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본인 휴대폰에 있는 멋진 풍경만을 그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한 번은 강화도 여행 중 본 환상적인 붉은 노을 사진을 제게 보여주시며, 그 그림을 작게라도 똑같이 그려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그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행히 그림 그리느라 집중하는 그 동안에는 통증이 줄어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지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도 치료사가 제안하는 방식이 아닌 본인이 아는 대로 노을을 칠해나가는데, 너무 짙은 색부터 칠해 그림이 금세 망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뜻대로 멋진 노을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리거나 그림 그리는 방식을 설명해드리려 하면 “김 선생, 내가 본 노을이에요. 내가 사진을 찍었고, 내가 더 잘 아는 것이니까, 내 방식대로 그리겠어요”라며 평소보다 불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제게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노을을 칠해나가다가 “망쳤다”며 네 장의 그림을 버리고 나서는 몸이 많이 아프다고 짜증내시고는 침대에 누워버렸습니다. 옆에 있던 가족들은 제게 여간 미안해하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 저에게 대신 미안한 눈빛을 보내셨습니다. 저는 퇴근 전에 다시 한 번 들르겠다고 환자분께 말씀드렸습니다. 퇴근을 앞두고 다시 찾아가서는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환자분이 체육을 하셨던 분인 것처럼 저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니, 사진 속 노을 그림을 제가 그리는 순서대로 한 번만 따라해 봐달라”고요. 그러자 환자분은 어린아이처럼 제가 시키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따라하셨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아니 거기는 그 색이 아니라 더 진한 남색이라니까”라며 제게 핀잔을 주기도 하셨지만 “밝은 색이 겹쳐서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에요”라고 저 또한 받아치며 환자분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요. 환자분은 집중해서 저를 따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본인 화폭에 원하던 노을 모습이 담기기 시작했으니까요. 하루 종일 노을 그림을 그리다 실패해서 짜증이 잔뜩 난 환자 때문에 긴장됐던 병실 분들도 한 분씩 침대 옆으로 다가와 “와, 이거 직접 다 그리신 거예요?” “정말 사진이랑 똑같네요”하며 박수를 쳐주셨습니다. 환자분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제가 한 것이라기보다 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렇게 나오네요”라며 멋쩍어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환자분에게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약사 선생님과 면담을 신청하고 그동안 약사의 정성어린 설득에도 답하지 않고 강경하게 거부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셨다 합니다. 진통제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듣고는 “전문가의 권유를 따르겠다”라며 순순히 약 복용에 응하셨다고요. 며칠 후 환자분은 제게도 사과하고 싶다며 고집스럽게 혼자 노을을 칠해나가던 본인의 모습을 반성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원하는 바가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제 제안을 받아들이셨고, 그런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격려해드렸습니다. 제 격려에 힘을 얻으셨는지, 가족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평생 고집스럽게 살아서, 나 때문에 답답했던 것이 있다면 정말 미안하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사과하셨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큰 변화이지요. 이처럼 미술 창작 과정은 삶의 새로운 것을 배우게 하는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유지하던 것들과 대항하고 혼란을 겪다가 자신에게 더 좋은 새로운 체계들을 익히기 위해 낡은 것들을 허무는 과정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려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시도하다 보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또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암 진단 이후 건강과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미술 작업 과정에서도 소중한 것을 알아차리고 깨닫는 경험이 가능합니다. 무덥고 습한 하루하루의 반복 속에서 새로운 것을 알아차리고 깨닫는 소중한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4/07/23/2024072301658.html |
출처: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1군단 원문보기 글쓴이: 니르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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