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조선 비타투어의 아일랜드-스코틀랜드 트레킹 답사 여행기 ⑤

아일랜드 해안에 나타난 낯선 동양인
작은 섬 나라여서 그럴까? 아일랜드인의 머릿속에는 거인에 대한 생각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골웨이에선 8Km에 이르는 해안절벽을 ‘거인의 정원’이라고 부르고, 슬라이고 인근 벤불빈 산은 거인 ‘핀 맥코울’이 마법에 걸린 수퇘지와 싸우다 밀려서 생긴 산이라고 한다. 오늘 걷게 되는 ‘거인의 둑길’은 전설적인 거인 ‘핀 막 쿠월(Find mac Cumail)’이 스코틀랜드에 사는 애인이 건너올 수 있게 만든 바다 위 둑길이라는 설명이다. 더블린 태생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도 거인이 등장한다. 끊임없는 이웃의 침공을 막아줄 영웅으로 거인을 기대했고, 그 기대가 거인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거인의 뚝길’은 아일랜드 섬 북부 해안에 위치한 북아일랜드 최고 관광지로 세계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수많은 관광버스가 손님들을 쏟아놓는, 제주도 성산일출봉 같은 ‘북적이는’ 관광지다. 채경석 TNC사장은 네비게이션과 트레킹 앱을 번갈아보며 한참 헤매더니 승용차 20대 정도가 주차할 수 있는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거인의 둑길 매표소에서 서쪽으로 4km 쯤 떨어진 곳으로, ‘상급자(advanced) 트레일’의 시작점이다.
해안선을 따라 부드럽고 편안한 산책로가 동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주변에 마을이 있는 것 같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유모차를 탄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거나 개와 함께 조깅을 하는 주민들과 드문드문 마주쳤다. 인적 드문 아일랜드 해안 마을에 트레킹 복장을 제대로 갖춘 동양인 사내 두 명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굿모닝"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마음이 느슨해지는 거인의 둑길
지금껏 선크림 바를 일이 없었는데 배낭 한 구석에 넣어뒀던 선크림을 처음 꺼내서 발랐다. 선글라스도 꼈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여인의 숨결 같은 산들바람이 귓가를 간질였고, 양털 같이 흰 구름 사이로 해가 들락날락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기에 딱 좋은, 그런 길이었다. 편안하고, 포근하고, 나른했다. 평지를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조금씩 고도를 높였는지 어느새 바다가 10~15m 쯤 아래로 보였다. 오른쪽으론 평화로운 목장 풍경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졌다. 금상첨화로 날씨까지 받쳐주니 아일랜드에 와서 처음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좋은 트레킹이란 보는 재미와 걷는 재미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다.
집을 떠나와 걸으면 무엇엔가 억눌리고 주눅이 드는 마음과 상상력이 조금씩 살아난다. 지난 삶과 내 모습을 차분히 돌아보기도 하고, 인생 후반기의 삶을 계획해보기도 하고, 로또가 당첨돼 돈 쓸 고민을 하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정의하는 걷는 재미다. 이런 재미를 느끼려면 마음이 매이지 않고 느슨해져야 한다. 모허 절벽처럼 천하절경으로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과 경탄으로 채워지면 그런 재미를 느낄 수 없다. 부렌국립공원 석회암 대지처럼 너무 이국적이어도 마음을 풀어놓기 힘들다. 마음속의 생각과 걱정과 욕심과 긴장감을 모두 풀어놓고 생각에 취해 걷다가 문득 주위를 보면 엄마의 품속처럼 포근한 풍경이 나를 안심시키는, 그런 여행지를 나는 좋아한다. 거인의 둑길 트레일, 첫 4Km가 바로 그런 길이다.

갑자기 넓은 주차장이 나타났고, 버스들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트레킹을 계속하려면 입장권(8.5 파운드)을 사야 한다. 얼마나 더 멋진 길이 이어질까? 관광지를 소개하는 대형 스크린과 기념품 숍을 지나니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관광 안내 책자에는 약 6000만 년 전의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이곳이 세계 최대의 주상절리 지역이라고 소개돼 있다. 펄펄 끓는 용암이 바다를 만나면 급격하게 식으면서 육각형이나 오각형 기둥이 만들어지는데, 그런 기둥이 약 4만개에 달한다고 했다.
이 사람들 상술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설적 거인이 만들었다는 바다의 뚝길은 10~20m쯤 이어지다 바다 속으로 사라졌고, 육각형의 주상절리 기둥은 기껏해야 몇 백 개 정도였다. 게다가 높이도 1~5m 정도여서 제주도의 주상절리보다도 못한 것 같았다. 우리는 어차피 걷는 것이 목적이니 상관없지만 비싼 입장료를 낸 관광객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부지런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숨이 턱에 차도록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넓은 목장이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풍경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왼쪽의 바다 풍경은 조금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깎아지른 50~60m의 절벽이 모두 주상절리였다. 조금 전 본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같은 주상절리 지형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 이곳이야 말로 걷는 자에게 허락된 축복이구나! 세계 최대 주상절리 지형의 파노라마는 지금부터 펼쳐지는데 그토록 수많은 관광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입장료를 낸 99%의 관광객은 ‘진짜’를 보지 못하고 장난감 같은 주상절리 마당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돌아간 것이다. 우리는 이 광대한 자연의 파노라마 무비에 등장하는 ‘유이한’ 주인공이 되어 총 13km의 트레킹을 마무리 지었다.

타이타닉 최후의 인간애
이곳 음식은 정말 비싸면서 맛이 없는 것 같다. 근처 작은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샐러드로 허기를 때우고 벨파스트로 이동해 타이타닉 체험관을 찾았다. 체험관이 있는 곳은 타이타닉이 실제로 건조된 장소. 바로 옆에 아직도 배를 건조하는 데크가 보였다. 놀이동산 같이 움직이는 박스를 타고 타이타닉 건조과정을 보았고, 3D 등 각종 첨단 영상으로 화려한 타이타닉 내부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타이타닉이 침몰하자 구명보트에 오른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함께 구명보트에 탑승, 선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찰스 래히틀러 이등항해사의 회고를 통해 타이타닉의 최후도 알게 됐다.
그의 회고록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영웅들의 모습이 소개된다. 당시 세계 최고 부자로 타이타닉 10대도 건조할 수 있는 에스터 씨는 자신에게 돌아온 마지막 남은 구명보트 한 자리를 옆에 있던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다. 미국 메이시 백화점(Macy’s) 창업자 슈트라우스 씨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보트에 타라는 제의는 거절하겠다”고 말하며 최후를 맞았다. 성공한 은행가 구겐하임 씨는 마지막 순간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으며 “죽더라도 체통을 지키고 신사처럼 죽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미스 부인은 마지막 남은 두 자리에 자신의 두 아이를 태웠는데 구명보트에 있던 한 여성이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하다”며 자리를 양보했다고 한다. 명예와 신사도와 인간 존엄성을 지키며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의 휴먼스토리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 헬스조선 비타투어의 아일랜드-스코틀랜드 트레킹 답사기는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출처 : http://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2/20181122008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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