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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건강상식/한방상식

[스크랩] 경혈·경락 실체 밝혔다는 납북 김봉한 박사와 봉한학설은 왜 자취를 감췄나?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16. 11. 9.

‘봉한학설’은 1960년 중반 한의학에서 말하는 ‘경락’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봉한학설은 1967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연구자 김봉한 박사도 자취를 감췄다. 세계적 주목을 이끌었던 봉한학설은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사진=헬스조선DB
사진=헬스조선DB

지난 9월 22일 연세대 보건대학원 총동창회 조찬회에서 역사 속 40년간 잊혀져 있던 이름이 거명됐다. 대한약사회 국제위원회 이혜경 위원이 ‘북한 보건의료 현황’ 특강에서 김봉한이란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이혜경 위원은 김봉한 박사와 관련해 ‘북한으로부터 경락실태 연구를 강요받고 거부하다가 당적 제재가 심해 경락연구소 운영을 맡았지만 연구실패로 처단됐다’는 내용의 슬라이드를 강연자료로 사용했다. 북한 최고 의학자로 불렸던 김봉한 박사가 연구를 강요받고 연구에 실패해 처단됐다는 사실은 봉한학설을 새로 보게 했다.

 

봉한학설이란 무엇인가
한의학에서 침이나 뜸을 놓을 때 경혈에 놓는다고 말한다. 경혈은 피부나 근육의 중요한 반응 부위로 우리 몸에는 약 361개의 경혈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각 경혈을 이어 기혈(氣血)이 순환하는 통로를 경락이라고 부른다. 한의학에서 경락은 인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주관하는 통로로, 경락을 잘 조절하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머리 꼭대기에 있는 ‘백회’란 경혈에 침을 놓아 치질을 치료한다. 한의학에선 경락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서양의학에서는 몸안의 통로를 혈관·림프관·신경계 등을 꼽는데, 경락은 서양의학에는 없는 완전히 다른 통로인 것이다. 한의학 고전인 《황제내경》에는 경락이 근육, 내장, 뼈 심지어 손톱과 머리카락까지 뻗어 있으며 이를 통해 기가 흘러 인체가 살아 움직인다고 기술돼 있다. 하지만 경락은 해부학적 실체가 없다. 경락을 통한 한의학적 치료가 서양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질병에 효과를 보이면서도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학문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혈·경락 실체 밝혔다고 주장해 세계적 관심 모아
1960년 초 경락의 해부학적 실체를 밝히려는 시도가 있었다. 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김봉한 박사는, 1961년 8월 ‘경락의 실태에 관한 연구’ 논문을 내놓으면서 ‘봉한학설’을 통해 경락의 실체를 밝히려던 인물로 꼽힌다. 특히 북한 정권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전자현미경, 방사선 추적장치 등 첨단 연구장비를 통해 경락의 실체와 관련된 논문을 5편 발표했다. 당시 김봉한 박사는 “경혈자리에서 지름 0.5~1.0mm 형태의 작은 조직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조직은 원형이며 원형 내 여러 가닥이 다발로 돼 있다고 했다. 김봉한 박사는 경혈 자리의 조직을 ‘봉한소체’로 불렀고, 각 봉한소체가 연결된 관을 ‘봉한관’으로 불렀다. 즉, 봉한관이 경락에 해당되는 것이다.

봉한학설은 ‘몸안에 새로운 연결망이 존재한다는 실체를 밝혀냈다’고 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김봉한 박사는 토끼의 경혈에 염색약을 주입해 경락의 실체를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논문에는 염색약의 재료와 방법을 밝히지 않아 어느 누구도 확인실험에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북한은 봉한학설을 내놓은 김봉한 박사에게 당시 평양의대 생리학강좌장, 경락연구원장 등을 내주며, ‘세계 과학사의 금자탑을 이룬 업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봉한학설은 1965년 이후 북한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김봉한 박사는 1964년판 <조선중앙연감>에 사진이 실릴 정도였다. 조선중앙연감에 사진이 실리는 것은 김일성 부자 외에는 극히 드문 경우다. 그런 김봉한 박사의 연구가 한순간에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순간 사라진 봉한학설과 김봉한의 죽음
세계적 주목을 받던 봉한학설 연구의 중단에는 많은 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봉한학설에 대한 학문적 비판, 김봉한 박사의 연구를 지원하던 박금철의 숙청, 생체실험에 의한 연구 폐기 등이 꼽힌다. 김봉한 박사의 경락 실체 발견은 서양의학계를 뒤집어놓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서양의학은 경락의 존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경락의 실체가 발견됐고, 더욱이 경락이 생명 유지, 질병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서양의학 입장에선 견제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봉한학설은 당시 서양의학자들의 주목을 이끌었지만 얼마 안 있어 세계의 많은 의학자에게서 비판을 받았다.

경락을 인정한다면 몸안의 연결통로를 혈관, 림프관, 신경계를 토대로 발전한 서양의학 체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당시 봉한소체 실태를 검토한 계운홍 박사(납북 전 서울대 교수)는 검토 과정에서 “이거 토끼털 아니냐?”라고 지적했다. 김봉한 박사가 토끼의 경혈에 염색약을 넣어 확인한 경락 모양을 토끼털로 의심한 것이다. 1967년 당시 소련은 ‘경락에 대한 실태 발견은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없다’는 발표를 내기도 했다. 놀라운 발견이지만 외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는 김봉한 박사의 고립을 가져왔을 수 있다.

봉한학설이 정치적 이유로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김봉한 박사 연구를 물심양면으로 지지한 북한 당중앙위원회 박금철 부위원장이 숙청당하면서 함께 연구가 중단됐다는 것이다. 1960년 중반 김일성은 자신의 우상화 작업에 소극적인 갑산파를 숙청했는데, 박금철은 갑산파의 일원이었다. 실제로 김봉한 박사의 주요 연구는 박금철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1956년부터 1967년 사이에 진행됐다. 물론 봉한학설은 박금철이 숙청된 1967년 이후 자취를 감췄다. 생체실험도 봉한학설이 자취를 감춘 이유로 꼽힌다. 경락은 기혈(氣血)이 순환하는 통로로, 살아있는 생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봉한 박사는 토끼의 경락을 확인했지만 인체에선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체에서 경락을 확인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생체실험은 일본 제국주의 731부대가 저지른 만행과 같다. 학문적 이유라도 금기시된 행위다. 하지만 김봉한 박사는 북한의 대대적 숙청작업으로 발생되는 생체실험용 인체를 공급받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결국 북한은 생체실험이란 윤리적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봉한학설을 폐기하고 김봉한도 숙청했다는 설이다.

 

납북된 김봉한 박사, 연구 실패로 숙청?
북한의 보건의료인력 양성 차원에서 의사들이 납북됐다는 사실도 김봉한 박사가 숙청된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된다. 북한은 해방 직후 의과대학이 한 곳도 없었다. 이에 1948년 평양의전과 함흥의전을 의과대학으로 바꾸면서 부족한 의사를 채우기 위해 20여 명의 의사들을 납북했다. 2013년 북한인권의사회는 “국내 총 18명의 의사가 납북됐고, 이 중 10명이 서울대 의대 교수”라고 밝힌 바 있다. 김봉한 박사도 이들 중 한 명에 속해 있었다. 특히 납북의 한계는 북한사상 동조에 대한 신뢰성이 약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납북된 대부분의 사람은 숙청당했다. 따라서 김봉한 박사의 봉한학설 연구도 북한 정권의 강요로 진행됐을 수 있다. 납북 이후 숙청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진행된 연구일 수 있다. 봉한학설이 결과만 있고 과정이 생략된 점이나, 당시 김봉한 박사 외에 누구도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점 등은 강요로 진행된 연구라는 설에 힘을 싣는다. 고려수지침학회 유태우 회장은 “김봉한 박사는 납북된 후 북한의 강요로 연구를 진행했다는 많은 증언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제는 김봉한 박사에 대한 환상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 암정복 그날까지
글쓴이 : 정운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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