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치험례
아내의 류머티스 관절염, 그 고열과 통증
주병희
(농민, 전남 나주시 봉황면 옥산리 38번지, 0613-31-3029)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아내의 나이 53세 때의 일이다. 모든 농촌 아낙네들이 그렇듯이 아내는 잠시도 쉴 여가가 없을 만큼 일이 무척 많았다. 나는 이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일은 돌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일꾼들을 쓴다고는 하지만 거의 아내 혼자 집안의 대소사를 꾸렸다.
어느 날 아내가 양쪽 어깨가 열이 나며 아프다고 하였다. 여자의 몸으로 닥치는 대로 힘든 일을 하니 몸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러 약국을 찾아다니며 약을 복용하였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이웃에 사는 분이 광주 양동시장 입구에 있는 배약국을 소개해주셨다. 배약국 약은 그중 효과가 좀 있어서 1년 정도 약을 대먹었다.
매일 약을 먹다 보니 나중에는 약을 안 먹을 수가 없었다. 몸에 통증이 오고 열이 나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약을 먹다 보니 나중에는 그 약도 효과가 없었다. 약중독이었는지 몸이 붓기 시작했다. 얼굴은 물론 손목, 발목까지 부어올랐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목이 굳어져 갔다. 마음이 다급해져 있는데 누군가 금천면에 있는 달마원 한약방이 약을 잘 짓는다고 했다. 한약방 선생님이 류머티스 관절염이라고 하시며 약을 지어주셨다. 열 재만 먹으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다 먹어도 도무지 호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세 재를 더 먹었지만 몸의 열과 통증은 날로 심해져 갔다.
통증을 못 이겨 진통제를 맞았다. 그후 진통제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진통제도 효과가 없자 광주 금남로에 있는 박혜진 내과의원을 찾아갔다. 그분은 우리와 동향(同鄕)으로, 상당한 경력에 전문의 박사과정까지 마치신 훌륭한 분이다. 집사람를 진찰해 보시더니 나를 꾸중하셨다. 무슨 약을 먹었길래 몸이 이토록 망가졌느냐면서 약중독이 심해 이런 상태에서는 약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치료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집에 가서 통증이 오면 진통제나 맞고 견디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절망적인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둘째딸 향득이가 장두석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장 선생님 댁으로 가서 치료를 한번 받아 보자고 했다. 그때 우리 딸은 광주 가톨릭농민회 간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둘째딸이 날마다 장 선생님 댁으로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30일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다.
치료과정을 말하면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특별히 약을 쓴 것도, 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관장을 하고 배에 된장찜질을 했다. 통증이 있거나 부은 곳의 관절에는 겨자찜질을 했다. 아내는 아침 일찍 일어나 풍욕을 하고 모관운동, 붕어운동, 합장합척운동, 냉온욕을 했다. 아침식사는 거르고 점심·저녁 하루 두 끼만 먹었다.
이렇게 치료하여 몸은 거의 완쾌된 상태에서 시골집으로 와서 1년을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실시했다. 열과 통증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손목과 발목에 부기만 조금 남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시골에 내려오니 제일 어려운 것이 매일 냉온욕을 하는 것이었다. 목욕탕이 없어서 연탄불이나 땔감으로 불을 때 물을 데워서 했다. 이렇게 하니까 몸은 야윌 대로 야위었으나 육체적 힘이나 정신력은 그 전보다 좋아진 듯이 보였다.
식사는 다섯 가지 이상의 채소를 볶은 소금, 참기름, 깨소금을 혼합하여 먹고 현미가루를 생수에 타서 먹었다. 생수와 감잎차는 기본으로 달고 살다시피 했다. 단식도 처음에는 하루로 시작하여 서서히 늘렸다. 단식을 하고 나면 정신이 어지럽고 몸은 기진맥진해졌지만 풍욕을 하니까 생기가 나고 손에 땀이 나며 정신이 맑아졌다. 또한 신비로운 명현을 느꼈다. 아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지 못했는데 냉온욕을 할 때 냉탕에서 꿇어앉을 수가 있었다.
그때 장 선생님을 못 만났다면 아내는 지금쯤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장 선생님께 치료비나 약값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였다.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은혜도 갚지 못하고 배은망덕하게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간직하며 살 것이다.
의학적 소견
이종금 씨를 만났을 때 내 처지도 몹시 딱한 상태였다. 집이 없어 월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집에 이종금 씨는 가톨릭농민회 간사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던 딸 향득 양의 자취방에 머무르며 딸과 함께 새벽 4시에 다녀가곤 했다.
이종금 씨는 온몸이 굳어 손목·발목조차 움직이지 못해서 딸에게 업혀다녀야 했다. 촉수를 해보니 몸이 무척 안 좋았다. 호르몬제의 과다한 복용 때문에 몸이 퉁퉁 부어 있으니 본인의 고통은 얼마나 심했겠는가. 약을 너무 많이 복용한 결과 위에 염증이 심해 단식도 시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풍욕은 물론 냉온욕도 혼자 할 수 없어서 향득양이 찬물에 어머니를 보듬고 들어갔다가 뜨거운 물로 옮겼다. 풍욕을 할 때에는 눕혀 놓고 담요만 벗겼다 씌웠다 했다.
그렇게 한 달을 생식을 하며 이런저런 요법을 실시하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이종금 씨는 나주의 집으로 돌아갔고, 이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렸으나 염려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을 내어 이종금 씨 댁으로 찾아가 보았다. 농촌지역에 살고, 워낙 순수한 사람이어서 가르쳐준 대로 하고 있었다. 곡식가루와 밭두렁, 논두렁에서 나는 잡풀을 뜯어다가 자신이 키우는 소와 함께 먹고 있었다. 흐뭇하게도 몸은 거의 회복되어 있었다.
죽으라고 내놓은 사람이 살아나자 그 마을사람들이 모두 따라하고 싶어했다. 나는 마을사람들의 요청으로 성당에서 하루 강연을 통해 자연건강법을 알려주었다.
요즘 농촌지역을 가보면 걱정이 앞선다. 청년들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고된 농사에 시달리니 건강이 당연히 좋지 않다. 농약에 의한 약물중독도 농민들의 몸을 망치는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농촌지역사람들은 순하고 아직 때가 묻지 않아서 곧이곧대로 믿고 실천한다. 그래서 치료가 빠르다.
이종금 씨를 통해 나도 많은 것을 얻었다. 의자(醫者)로서 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시달리고 부신피질 호르몬제로 인해 온몸이 붓고 마비되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회생한 것이다. 나는 촛불 같은 생명력만 있으면 환우는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종금 씨는 내게 깨달음을 준 스승이다.
나는 또한 이종금 씨를 통해 가족의 이해와 협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남편인 주병희 선생의 지극 정성과 딸 향득 양의 극진한 효심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더욱이 향득 양은 내가 소속해 있는 한국가톨릭농민회연합회 간사로 재직중이었는데 정의와 애국심에 불타는 여장부였다. 그녀는 나주지역 농민운동의 선구자로 황폐화하는 농촌을 지키기 위해 군부독재에 맞서 농민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서서 일하는 등 수차례 투옥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또한 사리가 분명하고 예절 바른, 언제나 돋보이는 당찬 여성이다.
돌이켜보면 환우들이 없었다면 나는 어느 것 하나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죽어 가면서 철인과 같은 의지로 건강법을 실천해준 환우들은 민족생활의학의 산 증인이며 나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아울러 스러져 가는 농촌을 지켜주는 농민들의 순수함, 땅에 대한 원초적 친화력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자연의 풋풋함이 살아 있다. 자연과 가까이 사는 사람은 도에 이를 수 있다. 이 땅의 농민들은 전부 살아 있는 예수요 도인이며 우리 모두의 스승인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정신세계사, pp.3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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