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먹으면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이 걷기다. 일단 밖으로 나가라. 걷다 보면 DNA 속 잠들어 있던 걷기 본능이 깨어날 것이고, 건강한 육체와 정신이 풍요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신자본주의 위기가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인류의 진화가 궤를 돌아 다시 야생의 원시시대로 향해 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인간 사회의 최종 형태를 원시공산사회로 보았던 마르크스의 이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인류의미래가 고난의 시기를 넘어 더 나은 시대로 나아갈지, 아니면 극단적인 예언대로 문명의 몰락까지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확실하게 퇴보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인간의 육체적 능력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취미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 운동했던 사람들이 '건강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트레킹이나 사이클, 마라톤 같은 운동의 재미와 효과가 근래에 밝혀진 사실이 아니건만 동호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걷기 운동'의 붐이 일고 있는 것은 확실한 증거다. 수십 년을 걸었던 사람들이 굳이 시간 내어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걷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제대로 걷는 방법을 잊어버렸으며, 그로 인해 장기가 원활히 순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화생물학의 불변의 명제는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것이다. 이족보행이 인간을 규정하는 절대 양식임을 감안하면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왜 걸어야 하는지를 잊고 살아가는 인간은 결국 미래 종으로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어쩌면 오늘날의 걷기 열풍은 퇴화하는 육체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걷기는 현대 인류를 오늘날 자연계의 최후 승자로 등극시킨 결정적 조건이었다. 걷기는 인간의 건강과 생명, 종족 보존을 지켜주는 핵심이며, 더 나아가 인류가 오늘날의 문명사회를 영속시킬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두 발로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미래가 원시공산사회일지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걷기를 통해 인간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면 원시시대의 야만성으로까지 퇴보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운동과 비교하여 걷기가 중요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걷기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적 행위로 모든 움직임에 있어 가장 기본 동작이기 때문이다. 일본 국립과학박물관 인류연구부장인 바바 히사오 박사는 말한다. "사람은 직립 이족보행을 시작하면서 송곳니가 퇴화되었고, 이어 뇌가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발로 걷기 시작함으로써 원숭이 무리와 결별하여 자연계의 유일한 '직립 이족보행을 하는 영장류', 인간이 등장한 것입니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 이족보행의 등장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다수의 동물이 사족보행을 하는 이유는 네 발보다 두 발이 훨씬 생존에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이족보행의 인간은 사족보행 동물들에게는 없는 발바닥 통증과 무릎 부상, 허리 통증에 시달린다. 현대인 중 80%가 평생 한 번쯤 요통을 경험한다는 의학통계도 있다.
손해 보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두 발로 걸어서 안정성과 속도를 잃게 되었다. 직립보행으로 인해 뼈와 관절의 강도도 약해졌고, 하중을 견뎌야 하는 척추까지 위험에 노출되었다. 여성은 골반이 작고 좁아졌으며, 그로 인해 출산의 위험과 고통이 배가되었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진화했을까? 아직까지 인간의 이족보행으로의 진화에 대해 정립된 이론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이유가 있다면 에너지 효율성이다.
국민대학교 체육대학 교수이며 < 인간 사냥꾼은 물위를 달리고 싶어 했다 > 의 저자인 이대택 교수는 말한다. "인간이 처음으로 직립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700만년 전으로 보입니다. 당시는 지금보다 온화한 상태였으며,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지역이 넓게 확대되었지요. 아마도 네 발을 사용하던 우리 조상이 더 좋은 음식을 찾고자 더 멀리 이동하면서 네 발보다 두 발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즉 네 발의 안정성과 유용성을 버리고 두 발로 걸음으로써 이동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줄인 것입니다. 남은 에너지는 바로 자신의 성장과 생식에 재투자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의 운동 능력과 비교해 강력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이족보행이 정말 효율적일까? 이대택 교수는 인간의 신체가 최초 직립보행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족보행의 최적의 형태로 진화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인간은 걷거나 달리는 데 있어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방향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는 시도와 실패를 통해 효율적인 동작 유형을 개발했을 것이며,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으로 발달시켜왔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있다.
1955년에 과학자 패스모어와 더닌은 걷기의 효율을 연구한 바 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일주일에 약 9시간을 걷는 회사원이 사용한 에너지는 일주일 총에너지 소비량의 20%밖에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회사원과 달리 격한 육체 운동을 하는 광부는 일주일에 21시간 이상 걷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사용한 에너지는 겨우 7% 늘어난 27%에 불과했다. 걷는 양에 비해 에너지 소비량은 비례하여 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걸으면서 수백 종의 척추동물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그 나름의 체계로 최적의 에너지 소비 구조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신체 장기 역시 이족보행에 맞추어 진화시켰다. 그 한 예로 뇌신경과학 분야에서는 이족보행이 뇌 발달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족보행을 하는 동안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뇌를 발달시킨 것인지, 아니면 뇌가 발달하여 이족보행이 가능했던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일본의 과학교양지인 < 뉴턴 하이라이트Newton Highlight > 는 '인체를 지배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주제에서 내장, 신경, 골격 등 신체 모든 기관들이 이족보행과 연계되어 진화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뇌와의 연관성보다 훨씬 더 인정받고 있는 정설이다. 한마디로 걷는 행위는 인간의 육체를 형성해온 근본이며, 모든 신체 조직을 건강하게 운영하는 방법이기도 한 셈이다. 걷도록 구조화된 육체에 걷는 시간을 줄였을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이다.
걷기는 인간의 본능적인 이동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은 건강한 육체 회복을 목적으로 본능적으로 걷기 운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이 걸으면서 자연스레 깨닫는 것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적 건강, 즉 사유와 성찰의 시간이라는 점을 더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걷기의 철학Petie Philosophie Du Marcheur > 의 저자이며 철학자인 크리스토프 라무르는 인간의 걷기가 개인을 땅에 붙들고, 그럼으로써 개인과 땅, 지구, 세상과의 본질적 유대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체중은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들린다. 걷는 사람은 균형감각을 지닌 채 힘을 균등하게 분배할 줄 안다. 걷기는 다리, 골반, 몸통, 팔 그리고 머리가 모두 협력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근육을 균형있게 발달시키고, 밖으로 표출되기 전에 한 테제에서 다른 테제로 넘어갈 수 있는 변증법적 정신을 길러준다. 정신의 걷기는 변증법적이며 가장 적절한 균형을 추구한다. 몸과 정신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다."
앞서 밝혔듯 뇌신경과학에서는 200만년 전 인류에게 최초로 나타난 걷기는 팔을 자유롭게 했고, 팔은 도구를 사용하고 사물을 운반하며 몸짓을 전달하는 데 쓰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뇌가 발달하고 그와 연관된 지적 능력이 발달했다고 보고 있다. 철학자 루소가 그의 교육학적 견해를 담은 저서 < 에밀 > 에서 '우리의 첫 철학 스승은 우리 발이다'라고 말한 것이나, 크리스토프 역시 그의 저서에 "인간이 걷게 된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성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발로 생각하기 시작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걷기는 인간의 육체적 본능이자 정신적 본능이다. 그 본능에 따라 수많은 철학자들, 사상가들이 걷기, 산책, 여행을 통한 사유가 있었기에 인류 문화와 역사의 진보가 가능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그의 저서 < 걷기 예찬Eloge de la marche > 을 통해 사유로 향하는 걸어가는 경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걷는 것은 자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 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걷는 사람은 시간을 자신의 리듬으로 장악한다. 여러 가지 다른 이동 수단을 버리고 자신만의 이동 수단을 선택한다. 달력의 시간이나 사회적 리듬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시간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비판 철학자인 레지스 드브레는 "발걸음의 문화는 덧없음의 고뇌를 진정시켜준다. 걸어서 하루에 30km를 갈 때 나는 내 시간을 일 년 단위로 계산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3,000km를 갈 때 나는 내 인생을 시간 단위로 계산한다"고 말했다. 소설가 스티븐슨도 시간 권력 장악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 "더 이상 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이 보내는 삶, 그것이 바로 영원이다. 오직 배고픔으로만 시간을 측정하고, 잠이 올 때에야 비로소 끝이 나는 여름날 한나절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 권력을 장악하고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걷기를, 자기 속도를 찾는 것을 망설인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기에 여유롭게 쓰는 것을 낭비로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기준에 맞춰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이즈음의 가장 큰 화두는 '느림'이다. 느림에는 특유의 힘이 있다. 느림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퍼져나간다. 걷기는 느린 움직임이다. 이 우아한 기술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세상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고, 그것에 대해 고스란히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리듬, 우리의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걸음으로써 존재의 총체를 관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해야 한다. 시간의 부자가 될 것인가, 돈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암치유에 도움 > 건강운동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3 충주세계조정선수권대회가 기다려지는 이유~! (0) | 2013.05.15 |
---|---|
[스크랩] 배드민턴 즐기던 40대 男, 발뒤꿈치 통증 무시하다… (0) | 2013.05.14 |
[스크랩] 공원 운동기구, 무작정 따라하다간 탈나요 (0) | 2013.05.08 |
[스크랩] 숨쉬기 운동은 이제 그만, 연령대 별 운동 궁합 (0) | 2013.05.06 |
[스크랩] 운동은 1시간 이내·가끔씩 과식해야 ‘몸짱’? (0) | 2013.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