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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치료/국내외 암관련 시설

[스크랩]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09. 3. 12.

세계의 일류병원: 미국 - 슬론케터링 암센터

원자력의학원 진단검사의학과 과장 홍영준

암중에서도 췌장암은 진단후 2년내에 대부분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인 암이다. 그런데 몇 달 전 이런 췌장암의 전이를 차단시키거나 발생을 지연시키는 일종의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언론의 의료계 뉴스란을 일제히 장식했던 적이 있다. 당시 이 연구업적의 주인공은 열충격단백 (Heat shock protein) 연구의 전문가인 미국의 로버트 마키 박사였다.
일반인들은 이런 보도를 접할 때 자극적인 제목이나 과장된 내용에 우선 관심을 보이지만 의료계 전문가들은 단순한 제목이나 내용보다는 어느 기관의 어떤 팀이 그 연구를 수행했고 그 결과가 어떤 학술지에 발표되었느냐를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 언론의 센세이셔널리즘과 의료 상업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대중오도의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바로 연구자, 발표학술지, 소속기관 등과 같은 일종의 ‘브랜드 네임’인 것이다.
로버트 마키 박사가 속한 기관은 미국 뉴욕의 슬론케터링 암센터였고 ‘슬론케터링’이란 이름만으로도 그는 암관련 전문가 집단에게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뢰의 보증수표를 흔들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슬론케터링. 공식명칭은 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Memorial Sloan-Kettering Cancer Center)로 약칭 MSKCC라고 불리는 이곳은 1894년에 설립된 세계 최고(最古)이면서 최대인 종합 암센터이다. 또한 미국 시사 주간지 지가 매년 시행하는 베스트 병원 평가에서 이 평가가 처음 이뤄진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암부문 최다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명실공히 최고(最高)의 암센터가 아닐 수 없다. 그 비싼 맨하탄의 세 블록을 몽땅 다 차지하고도 모자라 여기저기 별관을 늘여가고 있는 엄청난 시설규모, 정규직 간호사 1,200여명, 전공의를 제외한 암전문 의무직 스탭 600여명에 이르는 쟁쟁한 의료진을 보유하고 있는 슬론케터링이라는 거인을, 본고에서는 그 역사와 강점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슬론케터링의 역사

지금으로부터 110년전 가족이 암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던 한 평범한 뉴요커가 암치료를 위한 종합적이고 전문적인 기관의 설립을 갈망한다. 이 사람의 작은 기부에 의해 1894년 오늘날 세계최고의 암센터 슬론케터링의 전신인 메모리얼 병원이 뉴욕에 세워지게 되고 이 병원은 단기간에 일약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암연구와 치료의 본산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된 것은 상당부분 초창기 병원장이었던 전설적인 병리학자 제임스 유잉의 리더십에 덕분으로 그는 오늘날에는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최초로 의료진을 내과와 외과로 구분하여 운영하였고 인근의 뉴욕 암병원을 병합하여 슬론케터링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엑스레이가 렌트겐에 의해 발견된지 6년이 지난 1902년, 이 미국 최초의 암센터에서 처음으로 엑스레이가 암치료에 사용되게 된다. 또 윌리엄 콜리 박사가 세균백신을 이용하여 최초로 면역치료의 실험을 한 것도 1903년 이곳 메모리얼 병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1915년 제임스 유잉은 백만장자 광산기술자인 제임스 더글라스와 협력계약을 맺고 병원내에 라듐과(radium department)를 설치하는데 이곳은 이후 미국내 방사선치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1917년에는 전세계에 공급되는 라듐의 약 3분의 1이 유잉의 메모리얼 병원에서 소모되고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내 최초의 방사선의학 연구실이 메모리얼 병원내에 설립되고 이때 연구원으로 그 유명한 마리 퀴리 박사가 1921년 영입되어 초창기 방사선 치료에 관한 각종 연구가 꽃을 피우게 된다.
1930년대 방사선 치료분야와 함께 암 수술분야, 특히 헤이즈 마틴이 이끌던 두경부암팀과 조지 팩이 이끌던 소화기 암팀이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그들이 개설한 외과계 교육 프로그램에 전국의 젊은 외과의들이 앞다투어 몰려들게 된다. 록펠러 가의 도움으로 땅을 기부받은 메모리얼 병원은 맨하탄 내 현재의 위치인 코넬의과대학 부근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1939년에 맨하탄 68가에 세계 최초의 소아암 병동을 비롯, 모든 암에 대한 부서를 갖춘 12층짜리 새 병원이 지어지게 된다.
사업가였던 알프레드 슬론과 찰스 케터링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천만 달러의 거금을 암센터 건립을 위해 내어놓는다. 이 기부금은 곧 슬론케터링 연구소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1950년대 슬론케터링 연구소에서는 수많은 ‘세계 최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에서도 최대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당시 슬론케터링에서 이루어졌던 항암제의 선별 및 효능시험법으로서 이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3만여개의 약제와 7만여개의 복합제가 슬론케터링 연구소에서 개발한 방법에 의해 선별검사가 이뤄졌고 이 가운데 많은 것들이 오늘날 임상에서 흔히 쓰이는 항암제로 자리잡고 있다. 이 와중에 1954년 민 추 리(Min Chu Li) 박사에 의해 전이성 암이 항암제 치료에 의해 최초로 완치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오늘날 간기능의 대표적 표지자가 된 혈청 GOT, GPT의 개발도 역시 1950년대 슬론케터링 연구소의 작품이었다.
1960년대 슬론케터링 연구소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하였고 이때의 연구자들은 생쥐에서 백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무엇인지 밝혀냈으며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비강암 발생에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기초 연구자들과 임상의사들의 활발한 공동연구는 1960년대 말 소아 백혈병 치료에 유용한 L-Asparaginase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1968년 싸이클로트론 1호기가 도입되어 오늘날 암의 첨단영상진단법인 PET 테크놀로지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1973년 새 1인실, 2인실만으로 600병상을 갖추고 18개의 수술실이 돌아가는 새 메모리얼 병원이 문을 열었는데 이곳에서의 기념비적 사건은 바로 골수이식의 시작이었다.
1980년 폴 막스 박사가 새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마침내 메모리얼 병원과 슬론케터링 연구소는 합쳐져서 오늘날과 같은 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로 개편된다. 이때 방사선 종양학과가 20개의 선형가속기를 갖춘 세계 최대규모로 완전히 확장되었고 이후 연건평 4만 평방 피트 규모의 유방암 센터와 30만 평방 피트의 록펠러 연구소가 건립되었다. 또한 건물 상층부에 호텔시설을 갖춘 10층짜리 외래 암진료 센터가 만들어졌고 외국 환자를 위한 국제센터와 비뇨기과 암 전문 센터가 각각 별도로 문을 열었다.
2000년 폴 막스 박사의 후임으로 6년간 미국립보건원(NIH) 원장을 지낸 헤롤드 바머스 박사가 영입되면서 슬론케터링 암센터는 분자생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그의 지도력 아래 임상진료와 암기초연구가 탄탄히 유기적 협조 체제를 이루면서 세계 최고 암센터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슬론케터링의 강점

슬론케터링 최대의 강점은 단연 보유하고 있는 인적자원의 우수성이다. 해마다 거액을 들여 우수 의료진, 연구진을 스카웃 해오기도 하고 교육훈련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등 인적자원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는 이렇게 우수한 의료진, 연구진을 제외한 다른 측면의 강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직원들의 명확한 사명의식
슬론케터링의 로고는 흡사 생선의 가시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늘을 향한 화살표를 아래쪽에서 세 개의 직선이 가로지르고 있는 형상인데 세 개의 가로 막대가 의미하는 것은 환자진료와, 연구, 그리고 교육이라고 하며 위로 향한 화살표는 의료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기본적인 방향성을 뜻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 진료와 연구 그리고 교육이라는 방법을 한데 모아 암정복의 그날까지 정진하겠다는 뜻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CI 작업이 좀 과다하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로고 못지 않게 슬론케터링에서 눈에 자주 띄는 것은 자신들의 슬로건인 "어디서든 최고의 암치료(The Best Cancer Care. Anywhere)"란 문구이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이 말을 몹시 좋아하는데 모두가 베스트란 말에 담긴 자신감 못지 않게 그 베스트가 암환자를 돌보는 데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슬론케터링을 있게 하는 그들의 첫 번째 강점이다.

2) 최고의 서비스와 철저한 고객위주 시설배치
‘사업가 A씨(50)는 지난해 미국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에서 피부암 치료를 받았다. 병원비.항공료 등으로 약 3억원을 썼지만 세계 최고의 서비스를 받은 데 만족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연간 5천~1만명의 국내 환자가 해외 진료를 받으며 1조원 이상을 쓰는 것으로 추정한다. 암 환자의 경우 1인당 최소 1억원을 쓴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문에 실렸던 슬론케터링 관련 기사 가운데 일부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의료비는 비싸다. 특히 뉴욕의 슬론케터링은 엄청나게 비싸다. 그런데도 아이러니컬한 것은 슬론케터링을 이용한 환자들의 만족도가 대단히 높고 또 이러한 환자들의 만족은 그들이 내어놓는 엄청난 기부금 액수와도 비례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병원들이 대개 그러하지만 친절과 최고의 서비스는 빼놓을 없는 슬론케터링의 강점이다. 또한 환자 대기 및 진료 공간도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고 각종 검사와 관련해서는 층마다 채혈실 등 동일 시설을 갖추어 환자 동선을 최소화시켜 놓았다. 고객을 위한 일이라면 병원 건물 상층부에 매리어트 호텔을 갖다 붙이는 것도 마다 않는 저들의 마케팅 전략은 하루 입원료가 무려 300만원씩이나 되는 특실에도 줄을 서게 하고 있다.

3) 글로벌 환자유치 전략
슬론케터링 타운이라 할 수 있는 맨하탄 요오크 애비뉴 66, 67, 68가와는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산뜻한 외양의 메모리얼 슬로언케터링 국제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슬론케터링의 명성을 듣고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암환자들이 첫 번째로 들르는 곳이다. 최소한 3~4개 국어는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상냥한 접수 데스크 아가씨들을 지나면 마치 호텔 로비를 방불케 하는 대기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대기의자에 앉자마자 말끔한 정장의 남자직원이 다가와 정중하게 내미는 우리말 신문에 놀라게 된다. 국제센터는 통역서비스도 잘 갖추어져있고 고객이 활용할 수 있는 각종 전산장비 및 슬론케터링과 현지 의료진이 화상회의를 할 수 있는 첨단 시설들 또한 완비되어 있다.
현재 해마다 약 1000여명의 해외 환자가 국제센터를 찾고 있으며, 그 중 40%는 유럽에서, 30%는 남미에서, 9%는 아시아에서 방문하는 환자들이다. 슬론케터링의 자료에 의하면 이 중 한국인 환자도 약 20-30여명에 달한다. 슬론케터링은 자기 병원에서 치료받고 귀국하는 환자들의 사후관리를 위해 세계각국의 유수 암센터와 협력병원 계약을 맺고 있다. 국경을 넘어서는 글로벌 환자유치전략. 이것은 슬론케터링이 향후 더욱 주력하게 될 것이 분명한 또 하나의 강점이다.

슬론케터링과 한국

슬론케터링은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탓인지 아직 국내에서는 경쟁되는 미국 병원들에 비해 인지도가 크게 높지 않다. 물론 과거 SK 그룹의 설립자인 고 최종현 회장이 신병치료차 방문했던 곳이지만 슬론케터링내에 한국계 스태프들이 많지 않은 관계로 사회 저명인사의 방문 치료소식도 별로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2002년 가을 한국의 암전문기관인 원자력의학원과 슬론케터링간에 협력병원계약을 체결함에 따라 향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2003년 10월 원자력의학원에서 제 1회 원자력의학원 슬론케터링 공동 학술대회가 개최되어 대장암과 폐암을 주제로 9명의 슬론케터링 의료진이 내한한 바 있고 내년에는 뉴욕에서 2회 학술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원자력의학원은 현재 슬론케터링 수준의 암환자 진료를 할 수 있는 국제암센터를 부지내 건립할 계획으로 있고 이를 계기로 의료진 교류 및 항암프로토콜 공유 등 세계 일류병원의 암치료 노하우가 속속 국내에 도입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