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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농부의 밥상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08. 11. 26.

농부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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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입의 거리는 가까우면서도 멀다.

가까운 것은 물리적 거리고, 먼 것은 밥이 입에 도달하기까지의 윤리적 거리다.

귀농한 사람들은 밥과 입 사이에 걸쳐져 있는 윤리적 거리를 두고 고민했던 이들이다.

귀농은 시골로 거주지를 옮긴다는 뜻만이 아니라 노동의 질적 전환과 생계를 꾸리는 형식의 변화를 아우른다.

귀농을 선택한 이들은 더 많은 소득보다 부림을 받지 않는 노동의 보람과

소박한 삶의 기쁨을 더 높은 가치로 친다.

더 많은 연봉과 승진을 찾아 떠도는 이 임금노동 유목민들은 현존을 향유하지 못하고 피동적으로 그것에 매몰당한다.

더 많은 임금이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넘어서서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가능하게 하겠지만, 주어진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욕망의 헛구멍을 임금노동이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혜령은 땅이 내는 소출로 밥을 짓고 그 밥의 정직함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소박한 밥상을 굳이 들여다보고 시시콜콜한 곡절을 맛깔나게 적었다.

이 밥상의 주인들은 농사짓는 이들이다. 귀농한 사정이 여럿이듯,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아가는 방식도 그 사정만큼이나 여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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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사람이 “자연 안의 한 생명체임”을 믿고 자연 생태에 순응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두루 탐문하고 만나 그이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으며 무얼 먹고 무슨 생각을 갖고 사는가를 소상하게 캐내 적었다. 이들은 자연농업을 하거나 유기농사를 짓고, 산속에서 저들만의 공동체 생활을 꾸린다.

유기농업은 천지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는 “땅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농법이다.

이들이 자연농법, 혹은 유기농사를 짓는 까닭은 사람이 따르고 지켜야 할 바른 윤리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충북 보은에서 소를 키우며 유기농사를 하는 이철희·강순희씨가 한 예다.

이철희씨는 처음부터 유기농을 고집해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안 쓰는 농사를 지었는데, 그 고집의 바탕은 유기농업이 땅을 살리며 삶의 근본을 바로잡는 일이라는 신념이다. 땅을 살리고 건강에 해가 되지 않는 농법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는 유기농사가 곧 바른 삶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까다롭게 따지고 가리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다. 그이들은 가공식품을 안 먹고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으며, 땅에서 나온 바른 음식을 취함으로써 몸을 섬긴다.

전남 승주 문유산 자락에 들어와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한원식씨와 안혜영씨의 삶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연농법은 땅을 갈지 않고 농약과 비료, 제초제를 쓰지 않으며 사람의 간섭을 줄이는 대신 많은 부분을 자연에게 맡기는 농법이다.

자연은 본디 모든 생명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살도록 되어진 세계다. 그것을 굳이 거스르는 일은 그 생명의 질서와 조화를 깨는 짓이다. 한원식씨가 자연농법을 고집하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바른 삶의 바탕이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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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멥쌀과 현미, 현미찹쌀에다 콩, 수수, 팥, 메밀, 옥수수, 율무, 통밀, 통보리, 밤, 이조, 검정깨 등등 스무 가지는 좋이 되는 곡식으로 지은 밥을 먹는다.

밥 한 그릇에 스무 가지의 곡식으로 지은 밥이 담기니 그 색깔이 희고, 붉고, 노랗고, 푸르다.

그 밥에 김과 김치, 멸치볶음과 같은 기본 반찬에다 호박나물, 표고버섯, 양파볶음, 풋고추와 날양파, 오이, 깎은 무, 이것들에 곁들여 땅에서 나온 쇠무릅, 거북꼬리, 순무 잎, 뽕잎, 모시잎, 비름, 명아주, 고마리 등과 같은 푸성귀를 밥상에 올린다.

이것들을 먹을 때 200번은 씹어 먹는다. 밥알 하나의 맛까지 속속들이 음미하고, 푸성귀의 작은 섬유질까지 꼭꼭 씹어 먹으니 땅의 풋풋한 기운이 그대로 몸 안으로 들어간다.

사는 모양은 다르나 하늘과 땅을 섬기며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산다는 점에서는

닮은 그이들은 대개는 인스턴트 식품과 인공 조미료가 없는 조촐하고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그것으로 몸을 모신다.

욕심을 버리고 자연을 법으로 받아들이니 그이들에겐 첨단기술이나 거대자본이 힘을 못 쓴다.

‘촌놈’ 임경락 목사와 오갈 데 없는 사람 30여 명이 화악산 자락에 한 식구로 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먹는 점심 밥상은 이렇다. 우선 현미와 멥살과 보리와 콩이 각기 제 색깔을 내며 어우러진 밥, 조선간장과 고춧가루로 버무린 가지무침, 새우젓 넣고 볶은 호박나물, 간이 세지 않게 졸인 무조림, 식초 쌀짝 넣은 무채와 양배추, 멸치볶음, 머웃대 무침, 비름나물, 날로 깎은 오이와 당근, 풋고추가 담긴 접시, 된장 종지…. 머웃대는 들깨를 갈아 무쳤고, 비름나물도 간장과 들기름으로 간을 했다.

수저를 들고 이들 사이에 궁둥이를 들이밀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싶다.

경기 화성에 ‘돈이 필요없는 사이좋은 즐거운 마을’이 있다.

산안마을이다.

젊어서 중국 철학과 선불교, 마르크스주의와 비폭력주의 등을 두루 섭렵한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의 사상과 취지를 따르는 30여 명의 사람이 닭 3만 마리를 키우며 일체사회를 이루고 사는 마을이다.

이들은 무소유를 원칙으로 삼는 삶을 산다.

이들은 “햇빛과 공기와 물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듯 이 세상 모든 물자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고 믿는다.

혼자서도 여럿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니 그야말로 내 것, 네 것 없이 사는 셈이다.

이들의 밥상은 어떤가?

현미밥, 청국장찌개, 배추김치와 알타리 김치, 노란 배추 속과 뚝뚝 선 날 당근, 조개젓과 다시마 무침, 고추 절임, 파래김무침, 간장과 설탕, 물엿을 넣고 은근한 불에 졸인 계란 장조림. 각자 밥을 푸고 반찬들은 개인접시에 담아 먹는다.

밥을 먹은 뒤 후식은 찐 고구마와 귤, 식혜다. 이들의 밥상은 나눔의 밥상이다.

전남 벌교에 사는 강대인·전양순 부부는 산야초를 썩혀 살충제로 쓰고, 농약 대신 백초액 원액을 물에 풀어 벼에 뿌리며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

강대인은 바이오다이내믹 농법, 곧 독일 사람이 만든 생명역동농법을 참고해서 만든 유기농법으로 파종하고 거두는 사람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주의 원리에 따른 ‘기생명농법’이다.

그이들의 밥상은 어떤가?

두부전골, 맑은 조갯국, 배추김치와 갓김치, 김과 가죽 자반, 방게 무침, 갖가지 채소를 넣고 무친 채소 무침, 매실 절임, 오행미로 지은 밥 한 그릇. 음식을 만드는 데 일체의 인공조미료는 쓰지 않는다.

자연의 기로 충만한 밥상이다.

밥상은 곧 하늘이다.

이 책을 읽으면 밥상이 곧 우주라는 게 실감난다.

편리와 이윤을 버리고 가난과 불편을 찾아 그것을 굳이 제 삶의 바탕으로 삼는 게 귀농이다.

그러나 귀농은 제 손으로 심고 거두는 일의 기쁨을 되살리고, 문명의 이기에 중독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어리석어 보이는 귀농은 숭고한 가치로의 첫 걸음이다.

이들은 저만 잘 살겠다는 이기주의와 나만 편하고 좋으면 좋다는 식의 편의주의를 저만치 밀쳐두고 떠나온다.

이들은 나눔에 적극적이다.

이들은 자연의 품에 안겼으되 제가 자연의 주인이라는 편협함과 오만함에서도 벗어나 있다.

이들은 비자발적 임금노동과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욕망과 헛된 기쁨의 매임에서 나와 땅이라는 생명의 토대를 끌어안고 그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는 자발적 노동에 투신한 사람들이다.

밥상을 보면 그이들이 어떤 철학을 갖고 사는지 불가피하게 드러난다.

먹는 법은 곧 사는 법인 까닭이다.

농부의 밥상은 자연과 인위가 조화를 이룬 상생의 자리다.

농부의 밥상이야말로 하늘이 사람에게 내린 밥상이다.

안혜령은 그 밥상에서 평화, 보약, 하늘, 신명, 나눔, 고집, 느림, 똥, 시, 기도를 본다.

농부의 밥상은 인스턴트 식품이나 육식 위주의 식탁이 불러오는 저 과잉과 “풍요의 질병들”인 암, 당뇨병, 심장계 질환 등을 쫓아낸다.

‘농부의 밥상’은 발품을 판만큼이나 속이 꽉 차 있다.

귀농을 계획하는 사람, 날마다 무엇을 먹을까가 근심거리인 사람, 그리고 먹고 산다는 것의 근본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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