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병10년, 나는 유방암을 이겨냈다.
[오마이뉴스 조명자 기자]
"안녕하세요? 환자 조명자입니다. 결과 듣고 싶어서요."
"아, 예…. 그렇잖아도 전화 드리려고 했어요. 과장님이 결과 보셨는데 아주 깨끗하답니다. 이제부턴 1년에 한번씩 검사 받으셔도 된다니까 내년에 오세요."
창문 밖 저 멀리 앞산을 휘어 돌며 소담스런 함박눈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주 깨끗하답니다. 깨끗하답니다……" 결과를 들려주던 맑은 간호사의 음성이 웅웅웅 울려퍼지고, 벅찬 환희에 나는 큰 한숨을 몰아쉬었다.
지난했던 지난 10년간의 싸움. 그래, 다시 시작이다. 1막 2장의 가슴 옥죄던 연극을 끝내고 2막의 새로운 서곡. 감사와 평화의 시그널로 첫발을 살짝 떼는 여유 있는 배우의 웃음처럼, 나는 그렇게 웃었다.
제가 유방암에 걸렸다구요?
1996년 1월 23일. 유난히 가슴 시렸던 그 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10년 전 그 해 첫 달, 우리 부부에게 청천벽력 같은 선고가 떨어졌다. 내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것이다. 지체할 것 없이 수술에 들어갔다.
어제처럼 생생한 그날의 아침 풍경. 수술실로 실려 가면서도 차마 남편을 바라볼 수 없었다. 나를 끌고 가는 침대가 저승사자 같아서, 복도 위 하얀 천장이 하얀 시트처럼 내리누르는 것 같아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외과 주치의 고 선생님이 수술실에서 나를 맞았다. 겁에 질린 채 실려 들어온 내게 안심하란 듯 싱긋 웃더니 내 손을 잡아 한쪽 가슴에 살짝 올려놨다. 그것이 내 한쪽 가슴과의 마지막 이별 의식이 된 셈이었다.
수술 첫날 밤, 남편은 한숨도 못잤다. 유방 절제 환자들이 겪는 림프절 부종. 그것을 막기 위해 매달아 놓은 팔을 40분마다 풀어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사랑처럼 위대한 것이 있을까?
남편은 마누라 살리기가 자기 인생의 지상 과제인 것처럼 헌신적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갖은 야채 씻어 녹즙을 만드는 남편. 입 짧은 마누라를 아기처럼 달래가며 녹즙 먹이고, 콩 갈아 콩물을 먹였다. 게으른 마누라 손 잡아 끌며 매일 적어도 만보는 걷게 하려 애썼고 일주일에 한번씩은 북한산 원효봉까지 등산을 했다.
바를 정자 그리며 108배 하던 아이들
그 때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이었던 딸과 아들도 수술실에 들어간 엄마를 위해 108배를 했다고 한다.
"엄마가 수술 받는데 우리가 할 게 있어야지. 그래서 인장이와 둘이 108배를 하기로 했어. '부처님,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하고 기도를 했지. 그런데 숫자를 자꾸 까먹어 할 수 없이 한번 절하고, 한번 종이에 적고. 그렇게 108번을 했어요…."
엄마 병실을 찾은 두 놈은 내게 자랑스러운 듯 기도 얘기를 했다. 어린 것들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탔으면 종이 펼쳐 놓고 '바를 정' 자 한 획씩 그어가며 108배를 했을까?
그 후 첫 항암 치료를 위해 다시 입원을 했다. 그런데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내 경우는 항암 치료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B형 간염 바이러스에 오래 동안 노출돼 있었기 때문에 간이 항암제 독성을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빈대 잡다 초가삼간 태우게 생겼으니…. 한 가지 검사를 해 양성 반응이 나오면 약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일단 검사를 받고 그냥 퇴원하시오."
투병기 나에게 빛이 된 세 사람
항암 치료에 완전 탈진돼 있는 다른 환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항암제조차 못할 형편이라니, 그럼 어떻게 살아나지? 앞뒤가 캄캄했다. 녹즙을 비롯한 야채식, 항암 성분이 많다는 홍삼 엑기스 복용 그리고 남편의 사랑과 운동…. 이것이 바로 나를 버티게 했던 치료 방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를 살린 사람 세명이 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내게 희망의 끈을 던져 주었던 등대 같은 사람들이다.
"우리 엄니는 마흔 두 살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는데 71살인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시던데, 뭐. 자경 엄마 걱정할 거 없어요."
남편의 가장 가까운 죽마고우 한사람이 문병 와서 들려준 말이다.
"내가 친하게 지내던 언니 중에 수술을 받은 언니가 있거든. 말마라. 그 언니 항암제, 방사선 다할 정도로 상태가 심했는데 지금 6년째 살아 있어. 후딱하면 팔이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올라 그 팔 붙들고 얼마나 울던지 나는 그 언니 몇 년 못살고 죽을 줄 알았다니까…."
적어도 방사선은 안할 정도이니 그 언니보다 희망이 있다고 나를 위로하던 후배의 말이다.
"나 아는 성당 교우 중에 도배일 하는 여인이 있거든. 3기 말에 발견돼 수술을 받았지. 그런데 항암제 1년 끝나고 채 머리칼도 자라지 않아 다시 도배 일을 시작하는 거야. 죽기 기다리며 누워 있긴 싫다면서…. 뭐, 저런 강심장도 있나? 기가 막혔는데 정작 그 여인은 담담하더군. 하느님이 데려갈 이유가 있으시다면 따라 갈 수밖에 없지 않냐고. 아주 달관한 사람 같았어."
4년째 씩씩하게 도배 일을 다닌다는 교우를 소개하던 남편 선배의 부인은 "아마도 생의 집착을 건너 뛴 낙천적인 심성이 그 여인을 버티게 해 주는 힘 아니었겠나"하고 추측했다.
3개월마다 정기 검진을 받던 그 다음 해, 꼭 1년 만인 1월에 다시 수술을 받았다. 난소에 생긴 종양이 악성으로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간 때문에 수술은 무리라는 내과 주치의와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는 산부인과 주치의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그 가운데서 나는 철저하게 제3자였다. 1년 만에 재발,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넋이 빠진 나는 두 주치의 사이에서 내 의견을 얘기할 정신도 없었다. 다시 간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수술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가리는 검사였다. 다행히 수술을 감당할 정도의 상태는 된다기에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자궁과 난소를 완전히 깨끗하게 떼어냈어요. 조직 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화근 덩어리 없애려고 멀쩡한 한쪽 나팔관까지 절제했노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산부인과 주치의의 표정이 생각난다. 하긴 유방암 환자의 전이 발병 중 난소암이 제일 많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들은 듯도 했다.
자궁과 난소가 없어 발생하는 후유증,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서비스로 한쪽 나팔관까지 떼어 준 산부인과 과장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직 하늘나라에 도달할 때가 안 되었는지, 나는 다시 살아났다.
'당신은 행운아'라고 하는 산부인과 주치의 말씀처럼 조직 검사 결과도 양성과 악성의 커트라인 선상에 있는, 아주 양호한 결과로 밝혀졌다. 다만 간 상태가 나빠 간암 발병이 염려가 되고 그 외에 유방암은 폐와 뼈로 전이가 잘 돼는 병이라 특별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처방이 내려졌다.
살기 위해 악착같이 약을 먹었습니다.
3개월마다 돌아오는 정기 검진을 만 6년 동안 한번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챙겼다. 하루에 두 번 먹는 약도 안 먹으면 죽을 것처럼 악착 같이 먹어댔다. 정기 검진 중간 중간 몇 번의 해프닝도 있었다.
간과 뼈 검사 판독을 하다 무엇이 의심됐는지 재검사를 다시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도 완전 초주검이 되었다. 암 환자에게 재검사는 재발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정밀검사 결과 괜찮다는 판정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염라대왕 앞에 바로 불려가는 줄 알았다.
절망적인 그 순간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동지들, 유방암을 딛고 일어선 그 세분을 나의 수호신처럼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그 사람들처럼 꼭 살아나리라. 마음 편하게, 희망만을 생각하며 꿋꿋하게 버티리라. 받기만 하다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받는 것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고 가야 된다는 책임. 그것이 내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다.
6년 후부터는 정기 검진이 6개월에 한번씩으로 늘어졌다. 그만큼 안정권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차인 올 해, 1년에 한번이라는 복음이 전해졌으니 이 기쁨을 어찌 혼자 누릴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나도 당신들의 희망이 되고 싶다. 유방암의 공포와 전이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환우들, 그들에게 나는 등대 불빛이 되고 싶다.
/조명자 기자
출처 :암 자연치유센터 원문보기▶ 글쓴이 : 숲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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