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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건강상식/한방상식

[스크랩] 체질에 맞는 한방차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16. 2. 24.

우리나라 차의 전래과정 및 역사=체질에 맞는 한방차

우리나라 차의 전래과정 및 역사  우리나라차의 전래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신 역사는 멀리 고조선 시대로거슬러올라갑니다.초의선사의[동다송(東茶頌)]에는 삼국시대 이전의 고조선 시대부터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이것은장백산중에있는석남과(石南科) 식물의 잎으로 차를 만들었다는 백산차(백산차)입니다.

 

그러나 이차는 대용차로 다도에서 쓰이는 차, 즉 정통차는아니었습니다.차는원래우리나라땅에자생하던 것이 아니라 중국 또는 인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차의 전래에 관한 기록은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에 보면 수로왕비 허황옥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차의전래에 관한 관심이 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즉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던허황옥이불과열여섯나이에김수로왕에게시집을올때인서기48년경,인도에서 가져온 물품 중에 차가 포함됐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더구나 가락국의 문화가꽃피웠던김해백월산에 죽로차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세시에는 과일,술 그리고 차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차 전래에 관한 공식전인 최조의 문헌은 [삼국사기]입니다.[삼국사기] 권 10 '흥덕왕조'와 [동국통감] 권 11'흥덕왕저'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것은선덕여왕(632~647)때이지만차종자가본격적으로 파종된 것은 흥덕왕 때(828)에 이르러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당나라 황제인 문종으로부터 받아 온 것을 지리산일대에파종해쌍계사나 화엄사 등을 중심으로 점차 전파되어 나갔던 것입니다.따라서 이때를 기점으로 차나무를적극재배하고 제다법이나 차 의례도 발달하고 중국 다문화가 폭넓게 수용되어 우리나라에 음다 풍속이시작된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차생활

신라시대의 차 생활을 말할때 신라화랑(花郞)들의차문화를빼놓을수없습니다.그들은차를매우좋아하는데 고려시대의 학자인 이곡(李穀:1298~1351)의 기행문[동유기(東遊記)에는 화랑들이 사용하던 차도구가 동해 바닷가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강릉 한송정(寒松亭)에 그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화랑들은차를나누어마심으로써서로강하게 결속할수 있었고,윗사람과 아래사람 사이에 예(禮)로써 화합할 수 있었습니다.이렇듯 화랑들의 수행을 돕는데 차 생활이 한몫 을 차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차 생활은 통일 신라로 이어지면서 더욱 화려한 꽃을피우는데문무왕때김수로왕의시제(時祭)에 차를 올린 것을 비롯해 각종 의례에 차를 흔히 썼다는 기록이 많이 발견됩니다.

 

특히 불가에서는 차가 정신을 맑게 해주고 졸음을 쫓게 해주어 선(禪)을 하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하여 다도 풍습이 널리 퍼졌고 불전에 공양할때차를쓰기도하였습니다.통일신라초기의원효대사(617~686)를 비롯해 많은 스님들이 차를 즐겨 마시던 차인이었습니다.

고려시대의 차생활

신라의 차 생활이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불교문화의 발전과 함께 더욱융성해왕실은물론이거니와모든 국가 의식,불교 의식에 차를 올리는 것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차는 귀중한 예물로 여겨져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흔히 하사하는 하사품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려에 와서 차이 사용이 늘어나자,궁정에는 다방(茶房)이라고 하는 차를공급하는관청이생겼고 큰 사원 주위에는 다소라고 하여 차를 생산하여 사원에바치는부락까지생기게되었습니다.또한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차와 다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귀족과 승려들은 앞다투어 중국의 차와 다기를 사 모으기도 했습니다.

 

고려전반에걸쳐왕,귀족,관리중심의차문화였고,무신난이후중엽부터는주로선비들이차문화를꽃피웠습니다고려의 문인들은 서로 약속하여 찻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문인들 간에는훌륭한찻자리에참석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찻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어야 했고 서역이 있었으며,예의와 범절이 바르게 지켜졌습니다.또한 고려이 문인들은 무아(無我)의 경지에서손수차를끓였고,차를마시어선(禪)을수행하고 도(道)에 이르렀습니다.

 

또 차는 사함이 없어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수신(修身)하게하며,진리를추구하는매개체로여기기도 했습니다.일반 백성들도다점(茶店)에서돈이나베를주고차를사먹을만큼기호음료로인기를누렸습니다.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고려인들이 생활속에 차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가를짐작할수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차생활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차생활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조선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쇠퇴하고 차 대신 술이 의식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차 생활 풍속이완전히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일부 선승(禪僧)이나 선비들 그리고 궁궐에서의 관례적인 제전에서 차는 그 명맥을이어 나갔습니다.

 

조선이 처음 건국되었을 때만 해도 조정과 왕실의 제도나 의례에서고려의음다풍속을잇고자노력하였고 선비 차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차문화가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어 차의 품격도 떨어졌고 다시(茶時)나 다모(茶母)등도 본래이 뜻이 없어지고 형식적으로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 말엽 다산과 신위,추사,초의를 중심으로 한때 차의 중흥기가 있었습니다.이때는 차의 제다기술도 상당히 좋아져초의선사가지은[동다송]에는'동차(東茶:우리나라차)는맛과약효가겸비된차로서색과향기와 맛이 훌륭함은 육우도 인정할 것'이라고 우리 차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조에 와서 차가 단절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대략 네가지로 정리할수있습니다.

첫째

는 불교문화와 함게 도입된 차가 조선 시대 성리학의 도입과 사원에 대한 억압책으로 사원이쇠퇴함에 따라 음다 풍습도 사라졌던 것입니다.

둘째

는 차 산지 주민들에 대한 차세의 부과로 민폐를 끼치게 되어 차생산지가줄고민중의차에대한거부감이 심화되어 기호음료도 정착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는 수질이 맑고 깨끗하여 그냥 마셔도 탈이 없고 물맛이 좋으며,밥을 지은 뒤 마시는 숭늉이곡차로서 차를 대행했던 탓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술과 담배이 선호로 인해 기호음료로서의 차에 필요성이 감퇴한것도중요한이유중에하나일 것입니다.조선에서 차가 쇠퇴의 길을걸을때이웃일본은무사에게차를장려하여정서를순화시키고단결력을 고양시켰던 것을 떠올리면 차 생활 쇠퇴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없습니다.


체질에 맞는 한방차

소음인

단정한 체형에 하체가 발달하고 균형이 잡혀져 있다.성격이조용하고온순하며내성적인 경우가 많다. 주로 몸과 손발이 차고 소화기병이 많으며 땀이 적고땀을내면피곤하다.

이런 소음인 체질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생강차가 좋고 소화가 안될때는귤껍질을 말려 끓인 차를 마셔도 좋다.

<이로운 차 >

기운이 없고 피로할 때는 인삼차.계피차.꿀차.쌍화차.수정과 등이좋다.특히집에서흔히 마시는 보리차는 몸을 차갑게 하므로 마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쑥차,현미차,차조기차,옥수수차,귤차,대추차,미역차,인삼차,영지차,꿀차,생강차,쌍화차,감초차,당귀차,천궁차,두충차등이 있음. 보리차,율무차,결명자차,오미자차,녹차등은 찬 성질의 음료로 과음하지 않는것이 좋다

태음인

체형과 골격이 굵고 허리와 배가 나오고 살이 찐 편이며 위장기능과식성이좋고음식을 잘 먹는 체질이다. 성격이과묵하고신중하다.평소에땀이많고땀을흘리면오히려상쾌하다.

율무차.들깨차.오미자차등이좋고특히감기기운이나음주후의숙취에는칡차가좋다.

또태음인체질에게는비만이나지방간,콜레스테롤수치가높은경우가많은데이때에는결명자차가좋다.두통에는 실제 국화 꽃잎으로 만든 국화차가 도움이 된다.

<이로운 차 >

율무차,현미차,칡차,땅콩차,도라지차,더덕차,미역차,다시마차,오미자차,둥굴레차,맥문동차,차조기차,마차,버섯차,은행차,살구차,매실차,귤차,들깨차등이 있음.

보리차,결명자차,녹차,인삼차,꿀차,생강차등은 과음하지 않는것이 좋음.

소양인

다부진체격에가슴이넓고허리밑부분이늘씬하다.강한성격에적극적이고진취적이며행동에거침이없다.주로몸이뜨겁고찬음식을좋아하며허리가아프거나소변이탁하거나건망증이있다.

소양인에게는화(火)가많아시원한성질의약재를달인차가알맞다.음기(陰氣)를내려주고하초(下焦)의정력을보해주는산수유차,신장기능에 도움을 주는구기자차 등을꼽을 수있다.

<이로운 차 >

보리차,산수유,구기자,녹차,박하차,영지 버섯차등이 있음.

더덕차,마차,현미차,도라지차,생강차,인삼차,꿀차,쌍화차등은열이많은소양인에게는과음하지않는것이 좋음

태양인

1만명 중에 10명 미만으로 거의 희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형은키가크고수척하며 어깨가 넓고 허리 부분이 약하다. 성격은 활동적이고열성적이며봉사정신이나의협심이 많다.

주로 허리 다리에 힘이 없거나 구토 증상이 자주 나타날수있다.이런태양인체질인경우 몸이나른하고감기에걸렸을때는모과차가효과적이며피를맑게해주는감입차,하초(下焦)를 보해주는 오가피차도 태양인에게 도움이 된다.

<이로운 차 >

솔잎차,감잎차,녹차,보리차,모과차,미역차,다시마차,오가피차 등이 있음.

인삼차,꿀차,도라지차,은행차,영지버섯차,호두차.더덕차,땅콩차율무차,차조기차등은과음하지 않는것이 좋음

 


차(茶)의 기원과 유래

일반적인 의미의 차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차나무의 어린 잎을 따서 만든 차 끓이는 재료이다.

즉 손질된 찻잎혹은찻가루를말하는데이를 마른차 혹은 찻감이라고부른다.차는제조법이나모양,잎을따는 시기에 따라 분류되는데 발효 정도에 따라서 발효차.비발효차.후발효차로 나눌수있고찻잎의여리고굳은 정도에 따라 그 품질이 세차.중차.조차로 구분된다.

 

이것과는 다르게 차나무의 잎이 아닌 것을 재료로 만들었을 경우에는 대용차라 부르는데 그 종류로는 감잎차.두충차.덩굴차.솔차.모과차.생강차.유자차 등이 있다.

둘째는 마른차가 물과 어울려서 만들어진 찻물을 뜻한다.

찻물로는 잎차나 떡차를 우리거나 끓인 맑은 차탕(茶湯)과, 가루차에 뜨거운 물을 부어 휘저어 마시는 탁한 차유(茶乳)가 있다. 차(茶)는 명(茗)이라고도 쓰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茶를 '차' 또는 '다'로중국은 차(cha), 일본은 쨔(jya)로 발음한다.

 

차의기원지는미얀마의이라와디강원류지대로추정되며그지역으로부터중국의남동부,인도차이나,아삼(Aasam)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차는 중국의 남동부에서 기원한 잎이 작은 중국계와아삼또는북미얀마에서기원한잎이크고넓은아삼계로 나뉜다. 중국계는 온대, 아삼계는 열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동남아시아의 주요생산지에서열대나아열대 나라에 보급되어 19세기 주요 산업이 되었다.

 

인도에서는1818~34년 중국계 종자가 시험적으로 재배되었고후에아삼계재배가이루어졌다.인도네시아 자바는 1690년 도입되어 1824년 상업적인 재배가 이루어졌고스리랑카에서는 70년 대에 크게재배되어 커피를 대신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동아프리카에는 20세기 초에 전파되었고 1920년대 및30년대에는케냐,탄자니아,우간다등에도입되었다.신대륙에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산투스 부근,칠레,페루의 안데스 산악지대에서 재배가이루어졌다. 일본은 805년에 사이초가 중국에서 종자를 가지고 들어가 재배하였다.

 

한국에 차가 전래된 시기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지만 직접 재배하게 된 것은 828년(흥덕왕 3년) 사신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중국산 소엽종(小葉種)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서 심으면서부터 이다.

차의 유래  [중국차의 유래]

'차의 역사는 중국에 있다'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처럼, 차의 기원은중국에서찾을수있다.실제로언제부터 차가 음용 되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기원전 수백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감은 확실하다.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난 세계 최초의약물학서적'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과당대의육우가쓴'다경(茶經)'을 보면 차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보면 '神農은 백가지 풀의 맛을 보고하루에 72가지의 독을 먹었지만 차로해독했다'라는기록이있으며'神農이나무밑에서탕을끓이며쉬고있는데우연히 나뭇잎이 탕 속으로 떨어졌다.


神農嘗茶圖

그 잎이 들어간 탕은 아주 좋은 향기와 맛으로 가득했다, 그 나무가 차나무였으며그때부터차를마시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등 신농과 차에 대한 전설은 아주 많다.

 

여기서 한 가지 공통점은 어느 이야기건 차와 차의 해독작용을 신농이 발견하였고차를해독과병치료를 위한 약재로 사용했다는사실에일치하고있다.육유는'다경'에서'차를마시는것은신농씨로부터비롯되었다고 주로공(周魯公)에게서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18세게영국의다학전문가인보울도그의서'중국차의 재배와 제법'에서' 차가 신농시대로부터 기원하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중국 차풍 양성과 흥기의 배경

중당(中唐)이후 차를 마시는 풍속은 그야말로 장강 이남과 이북을휘몰아치며최고극성기에이르게되었을 뿐만아니라백성들에게있어서는차를마시는일은더할나위없이매우새롭고도신선한충격이었다.심지어가난한 백성들에게 까지도“차는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 되었으며이러한찻잎의 대량소모로 인해 차를 심고 재배하는 지역 또한 상대적으로 증가 확산되어 갔다.

 

이후 찻잎은 곧 정부의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거대한 재원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잡세(雜稅)중에서도 단지 소금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세금을 거둬들이는‘조세의 일급 품목’이 되었다.

 

실제로 중국의 정사(正史)인《이십오사(二十五史)》의당대(唐代)이후각왕조의<식화지(食貨志)>의기록을 보면 가장 먼저 ‘염법(鹽法)’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으로 ‘차법(茶法)’이 기록되어 있음을봐도중국의 역대왕조가 얼마나 차세(茶稅)를 중요시 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당나라 중엽이후 차를 마시는 풍속은 해가 중천에 떠서 세상을 두루 비추듯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원인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성당(盛唐)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육조(六朝)이전에중국의음차풍속은여전히보편적이지못하다가당대에이르러보편화되기시작하였다.《선부경수록(膳夫經手錄)》에 “개원(開元:712~741년)?천보(天寶:742~756년)사이에 점차적으로 차가있더니 지덕(至德:756~758년)?대력(大歷:766~799년)연간에 이르러 곧 많아졌다.”

▲ 五代 백유자풍로와 차복(차솥)

당의 부국(富國)ㆍ강성(强盛)의 기초는 이미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貞觀)의치(治)’에서이미완성되었다. 당초의 ‘정관지치(貞觀之治)’는 부국강병만은 물론 영토의 확대와 정치.경제.문화는 물론 통치 등 여러 각 분야에서 이미 공고이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으며 대당제국의 기초를 확고히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개원.천보 연간에는 당나라의 번영과 부국강병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다. 양귀비(楊貴妃)로 인해 우리들에게 만고의 혼군(昏君)으로알려진당현종(玄宗)은실제로집권초기에거대한 포부와 창업정신을 가진 군주로써 요숭(姚崇),송경(宋璟),장구령(張九齡) 등과 같은 능력 있고덕망있는 현인(賢人)들을 대거 등용하여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불합리한‘서민(庶民)정치’를 많이 개선하였다.

 

이로 인해 개원.천보 연간의경제는당대의어느황제때보다매우견실하게번영을누리게되었다.국가와사회가 번영함에 따라 일상적인 사회소비품은 날로증가하였고,그중에도차(茶)의소비는당시사회경제를결정짓는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둘째는 수나라의 천하통일이후 양자강 이남과 이북의 교통이 급격히 발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던 천하가 한 나라로 통일을 이루고 사회와경제가발달함에따라또하나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바로 교통의 발달이다. 교통의 발달은 오래 동안 단절되었던 중국의 남북경제와문화를 연결하고 빈번한 교류를 촉발시켰다.

 

이에 남방의 전유물이었던 차와 차문화가 북방으로빠른속도로전파.보급되었다.또한지리적으로험악하여 육상교통이 불편한 곳은 수대(隋代)에 이루어 놓았던 대규모수로(水路)인‘대운하’로인해남북간의교통이 원활해짐으로 인해 황하와 장강의 양대 유역의 문화가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의 경제국면을출현시켰고 아울러 물건의 대량운반이 용이하게 되었다.

셋째는 육우의《다경》저술로 인한 차산업(茶産業)의 발전과 음차문화의 창도(唱導)이다.

북송(北宋)의 대시인 매요신(梅堯臣)은《차운화영숙상신차잡언(次韻和永叔嘗新茶雜言)》이란 시 중에서 “육우로부터 사람들 사이에 차가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서로배우며봄차따는일에종사하네.”라고하였다. 이는 육우가 당대 차산업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 《신당서(新唐書)》?〈육우전(陸羽傳)〉에는 “육우가 차를 좋아하여 다경(茶經) 3편을 저술하였다. 차의 기원과 차의 제조법, 차의 도구에 대해 모두 갖추어 말하였는데, 이로써 천하가 더욱 차마실줄을 알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육우가차의생산과제조등의차산업(茶産業)은물론일반백성들의차를마시는음차풍속(飮茶風俗)까지도 창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넷째, 승려(僧侶)와 도사(道士)들의 수도(修道)생활 중의 차의 재배와 음차생활이다.

당대(唐代)의 차문화와 차산업의 발달은 ‘당대의 불교와 도교의 흥성’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국의 도교와 불교는 일찍이 한나라(漢代)에서부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를거쳐당대에이르러서는황제들의관심과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그야말로 극성기(極盛期)를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사원경제도 덩달아 발전?번영하게 되었으며 당대(唐代)의 경제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은 물론 이후 역대왕조에까지 이르러서도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승도(僧?道) 양교의 주된 수련법은 모두 참선과 좌망(坐忘)인데 주로 밤에많이이루어지기때문에 수련에 있어 가장 큰 장애는 잠(睡眠)의 유혹이다. 그래서 이들은수련중에쏟아지는잠을쫓는수단으로는 차를 마시게 되었다.

 

원래 수련 중에는 어떠한 간식도 허락되지 않았으나 오직차만큼은수행중일지라도마시도록허락하였다. 이들의 차 소비량은 그야말로 폭발적이며 이는 당대 차 생산의확대와소비를부추기는데일조를가하기도 했다.

 

때로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사원(寺院)이나 도관(道觀)에서는 그 사묘(寺廟) 주변에 직접 찻씨를 심고 차나무를 재배하며, 차를 직접 제다하여마시기도하였다.이렇게만든차의최상급은부처님께공양하고 중등급은 향객(香客:신도)들에게 대접하며 하등급은 남겨두었다가 자신들이 밤에 수행할 때 잠을쫓기 위한 방편으로 마시곤 하였다.

 

특히 불교의 음차문화는 점차 확대되어‘사원다도(寺院茶道)’라는 참신하고 특이한차문화를탄생시킴은 물론도교와함께민간다도를창도해나가며더나아가‘일본다도’의전형적모태를형성하게되는‘다선일미(茶禪一味)’의 사상을 창출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까지 맥이 끊어지지 않고 전승되어온 가장 많이남아있는차문화의흔적은역시사원(寺院)이나 도관(道觀)을 중심으로 발달해온 차문화라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당대(唐代)의 기후가 전대에 비해 차업(茶業)의 발전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제1온난기

(溫暖期:BC 3000~1000년)

이시기는대략앙소문화(仰韶文化)와하남(河南)은허(殷墟)시대로황하유역에서 곧장산동반도에이르기까지모두죽류(竹類)가분포되어있었으며 안양(安陽)은허일대에는노루와대나무쥐(竹鼠),개,물소등의열대?아열대 동식물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제1한냉기(寒冷期:BC 1000~850년)

이시기는대략서주(西周)시기로《죽서기년(竹書紀年)》에의하면한수(漢水)가2차례나얼어붙었다고 한다

제2온난기(溫暖期:BC770~AD초)

대략춘추시대에서부터서한(西漢)에이르는시기로써《시경(詩經)》《사기(史記)》등의기록에의하면매,죽,귤,옻등아열대식물이분포되었으며 한기(寒期)때 보다 북쪽으로 많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제2한냉기(寒冷期:AD초~600년)

대략 동한(東漢)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시기로써 이기간중에는3세기 후반쯤에 기온이 갑자기 저하되어 매년 음력4월에도서리가내렸다고 한다.

제3온난기(溫暖期:AD600~1000년)

대략 수당오대(隋唐五代)시기로써“8세기초에매화나무를장안(長安)에 심었고 751년에는장안에 심었던 감귤나무에 열매가열렸다”고전한다

제3한냉기(寒冷期:1000~1200년)

대략 양송(兩宋)시기로써 이 시기엔 “태호(太湖)의 물이언(結氷)적이 있는데마차(馬車)가지나가도될정도로두껍게얼었으며그리고동정산(洞庭山)의 동산과 서산의 감귤들이모두얼어죽었고항주서는 매년 종일 눈이 내려 통상 늦봄까지 제설작업을 했다.”고 전한다.

이상의 기록들은 중국의 원시말기(原始末期)에서부터 송대(宋代)까지의기후변화의주기(週期)를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기후의 변화 주기를 살펴보면 당대 이전의중국차업(茶業)이비록빨리시작되었지만 왜 그렇게 더디게 발전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으며 또한 당대(唐代)의 기후가 가장 따뜻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는 차나무의 발견과 차의 식용이 이미 오래 전에 시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도 발전이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는지그리고왜당대에이르러갑자기흥성하게일어나게되었는지를 극명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다섯 가지 당대 차문화의 흥성요인 중에서도역시‘육우(陸羽)’는중국다예(中國茶藝)의 발전에 있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공로가 큰 인물이다.

 

그는중당(中唐)시기에자신이일생동안 쌓아 온 차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다경》세권을찬술하여음차의품격을한층높임으로써마침내 중국 정신문화의 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육우의 《다경》이 나오게되자도처에서이를흠모하여좋아하는 자들이 잇따라 다투어 배우고 차를 받들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있어 육우의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은 정말로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이며후인들에게 대서특필 될 만한 것이라 하겠다

4) 송 .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음차문화 전개

12세기 말 일본에 전래된 차풍(茶風)은 이후 '다도(茶道)'의 원류가 돼

2) 당나라 이전의 음차방식

당나라 이전의 음차방식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로 정리해 볼 수가 있다.

품명(品茗)

순수한 품다(品茶)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과(茶果)

품명(品茗)과 다과(茶菓)가 어울려 배치되는 것을 말한다.

분차(分茶)

차찬(茶餐)?다과?품명(品茗)이 함께 어울려 배치되는 것을 말한다.

모차(芼茶)

이것은 즉, 차죽(茶粥)을 말하는데 가루 차(末茶)를 자기(瓷器)에 넣고끓는물을부어 휘저은 다음, 다시 파나 생강 등을 넣고 조미하여 만든 죽을 말한다.

이러한 음차방법은 명?청시기에 지방에서 여전히 성행했으며, 현재에도 중국 호남(湖南) 중부 이북의 ‘안화(安化)’일대에서 ‘뢰차(?茶)’라는 이름으로 ‘객가(客家)인’들에 의해 여전히 전승되어내려오고있다.

 

당대의 주된 명차(茗茶) 제조법에는①추차(?茶),②산차(散茶),③말차(末茶),④병차(餠茶) 등의 네종류가 있는데 육우는 전자 세종(①②③)은그냥놓아두고후자(④)한종의제다법(製茶法)만을개량하였다.

여기서 ‘추차(?茶)’란‘거친차’를말하며중국에서는현재‘조차(粗茶)’로통용된다.

 

‘산차(散茶)’란떡차(餠茶)의 반대개념인 잎차(葉茶)를 가리키는말이다.‘말차(末茶)’는가루차를가리키는말이며‘말(抹)차’로표기하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가루차의 섬세한 정도에 따라 글자를 분류하여 사용기도 한다.

 

‘병차(餠茶)’란 찻잎을 떡처럼 시루에 쪄서 압착(壓搾)시킨 차를 가리키는 말이며 보이차가 그대표적인 차이다. 현대 제다법의 분류에서 대부분녹차(綠茶)와흑차(黑茶)로분류되지만요즈음은또새롭게제다법을 개발하여 반발효차인 오룡차 식으로 만든 후 다시 병차로 압착하여 재가공?생산하기도 한다고 한다.

3) 당대(唐代)의 음차법(飮茶法)

당대의 음차법에는 대략 다음의 세 종류가 있다.

암차(庵茶)

뜨거운탕(湯)을차완(茶碗)속에있는말차(末茶)위에붓고차를우려마시는법인데이러한방식은 후에 오대(五代)와 송대(宋代)의 표준음차법이 되었다.

자다(煮茶)

이미 끓은 물이 담겨져 있는 솥에 말차를 넣고 다시 한 번 더 달여서 차완에따라서 마시는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당대의 정통음차법이다.

모차(芼茶)

당대 이전의 음차방법으로 단지 일반 민간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모차에 대해서는 이미 위의 <당대 이전의 음차법>에서 설명하였다.

여기서 사용되는 ‘말차’는 지금처럼 녹차의 찻잎을 갈아서 만든‘말차’가아니라병차를연마(硏磨: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낸 차를 말한다.

4) 송대(宋代)의 음차문화

송대(宋代)는 문풍(文風)이 흥성하고, 학문과 기예가 크게 발전하여 ‘음차문화’는송대사회에서그야말로 정치한 면모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차와 관련된 상관지식 또한폭넓고심도있게나타났던것이다.

 

 

①투다풍기(鬪茶風氣)의전개,②다기제작의정교함,③식차(植茶)지식의진보,④제다(製茶)기교의강구(講究)⑤다서(茶書)?시화(詩畵)의 창조 등에 걸쳐 어느 한 분야라도 송나라 사람들의지혜가출중하게나타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국의 음차문화는 송대에 이미 그심후한기초를건립되었으며아울러음차의수준을한층더높은단계에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영향은후대에까지미치게되어‘명?청양대(兩代)의음차풍상(飮茶風尙)’을열게되었던 것이다.

 

송대의 인물들은 대부분이 사랑스럽고 존경할만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문인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 원인은 바로 당시 문인들의 문화적 소질이 높고 후실(厚實)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송대의 명인대가(名人大家)들을 살펴보면 일단은모두차와연분이있었다.그중에서도채양(蔡襄)같은 이는서예에뛰어나일찍이그명성을세상에드러냈으며특히차의감정에대해아주주도면밀하여《다록(茶錄)》을 저술하였는데《다록》에는 건안(建安)지방의 투다풍속(鬪茶風俗)을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건안은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수길(水吉)지역이다.이후, 송나라는 위로는조정으로부터,아래로는민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본받아 투다의 풍속이널리행해지게되는풍조를이루게되었다.여기서‘투다(鬪茶)’란 차 겨루기를 말한다.

 

각자가 재배하여 만든 차를 갖고 나와 서로 차의품질을겨루거나혹은자기들끼리상벌을정해놓고각자의 차를 우리는 솜씨를 상대와 겨루기도 한다.

 

여기서 독자들이 주의할 점은, “현재 중국에서는 ‘싸울 투(鬪)’자의 간체자를 중국어 발음이 같은 ‘말 두(斗)’의 자형을 빌려 쓰기 때문에 ‘투다’를 ‘斗茶(do?u cha?)’로 표기하지만 한국어로읽을때‘두다’로 읽어서는 안 되고‘투다’로 읽거나 ‘투차’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 중국의 ‘斗(do?u)’자는‘말두(斗)자’와‘싸울투(鬪)자’의공용글자로사용된다.)송대에이르러투다의 풍조가 성행한 것 이외에도 또 하나 제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차나무의 생물학적특성에대한 인식이 당대(唐代)보다 한 층 더 심화?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그들은또일찍이다도를통해좀더거시적인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 다문화사상 최고조에 이른 송대의 차풍(茶風)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당시송나라에유학온일본유학승‘에이사이(明菴榮西)’선사는남송(南宋)광종(光宗)소희(紹熙)2년(1193년)에 중국의 차 씨를가지고바다를건너일본으로돌아갔으며묘우예(明惠)선사에의해차재배가성공하였다.

 

이때 에이사이 선사는항주여항의경산사(徑山寺)에들러당대(唐代)고승이자협산사개산(開山)종조(宗祖)인 ‘선회선사(善會禪師)’로부터계속이어져내려온‘다선일미’의법통을이어받은‘원오(圓悟)?극근(克勤)’선사에게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쓴 친필 휘호를 함께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다선일미’의 차풍을 크게 일으키게 된다.

 

이후 일본인들은 차를 심고 차를 마시는활동을점차전개해나감으로써마침내일본특유의「다도(茶道)」를 성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차 씨와 차문화 또한그뿌리를중국에 두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차의 유래]

중국의 차를 신라의 선덕여왕이 마셔오다가흥덕왕 3년(828)신갈의김대렴이당나라에서차씨를가져오자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그 뒤 차문화는 고려 시대에한참흥하였다가조선시대에접어들면서배불사상으로 인해 주춤하게 되었다.


5) 명대(明代)의 음차문화

송나라 때 최고조에 이르렀던 중국음차문화의 왕성한 기운은 명대에 이르러 그야말로 또 다시 극성에 달한다. 명대에는당(唐)?송(宋)시기의복잡하고번잡스러운음차방식을지양하고산차(散茶:잎차)로우려내어 마시는 간편한 방식으로 대체하게 된다.

▲ 명나라 사람들의 飮茶事圖

이는 명나라태조주원장의차법(茶法)의개혁으로부터시작되는데몽고족의원나라를멸망시키고한족(漢族)의 왕조인 명나라를 건립하면서 가장 중요시했던정책중의하나가바로‘차법’이다.

 

주원장은명나라건국이전인 원(元)나라 지정(至正) 21년(서기 1361년)에 이미차법을설립하여개인적으로 차를 국경 밖으로 수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사차출경금지(私茶出境禁止)법’을 비롯하여여러가지차에 관한 정책을 실행하였으며 명나라 건립이후 차법은 여러 각 분야에서 더욱 구체화되어 실행된다.

 

특히차를사고파는상인들에게부과하는‘차세(茶稅)’와변방민족의통치수단으로진행된‘차마무역(茶馬貿易)’은 실로 가관이다. ‘차세’와 ‘차마무역’에 대해서는 후에 따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어쨌든명대에 이르러 이렇게 획기적으로 개량된 음차방법(泡茶法)은 오늘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명대에는 다서(茶書)의 저술 분야에 있어서는 수적인 면에 있어서 그 어떤 왕조보다도 월등히많았으며 음차생활에 있어서는 가히 본받을만한 방향을 확립하였다. 차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은 당나라초기에서 청나라 말기(618년~1897년)에 이르기까지 이미 발견된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당나라때에육우의《다경》등7종이있고오대(五代)때에는전촉(前蜀)의모문석(毛文錫)이쓴《다보(茶譜)》, 송대의휘종황제조길(趙佶)이쓴《대관다론(大觀茶論)》등26종,명대에이르러허차서(許次?)의《다소(茶疏)》,나름(羅?)의《차해(茶解)》등 56종, 청대(淸代) 진감(陳鑒)의《호구다경주보(虎丘茶經注補)》등 11종 이 있다.

 

명대는 이 뿐만 아니라 음차의 유형에 있어서도 이미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표준을 마련하게된다.이는 음식문화에 왕성한 욕구를 보이는 중국의 한족이송대의까다롭고사치스럽게말차(가루차)방식으로마시던 병차(餠茶)를 대신하여 출현하게 된 간결한 잎차방식의 ‘녹차(綠茶)음용법(飮用法)’만으로는도저히차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오룡차를 대명사로 출발하는 반발효차인 ‘청차류(靑茶類)’가 등장을 하게 된다. 이는 또 하나의 참신한 차의 탄생을 알림과 동시에 새로운 양식의 다기의 출현을 예고했다.

 

음차법의 개혁으로 인한 다기(茶器)의 개량은 그야말로 획기적이고도 참신한국면을창조하였는데그것은 바로 의흥(宜興)의 ‘자사호(紫砂壺)’이다. 명대의 문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실생활과예술과의조화와 배치에도 그 능력이 아주 뛰어나 우아함(雅)과 편안함(適)을 추구하는 동시에 고요함(靜)과 흥미(趣)를 함께 강구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전형적인 ‘문인(文人)?아사(雅士)’라면 당연히 차예(茶藝)에도 마음이 끌리지않을수가 없었으며 또한 실지로도 그들은 상당한 시간과 정열을 다예에 쏟기도 했다


출처 : 최고의 영양소
글쓴이 : 조영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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