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끼의 위로
먹는 걸 업으로 삼다 보니 밥 굶을 일은 없다. 아니, 오히려 평균적인 한국인보다 훨씬 잘 먹고 다닌다. 특히 취재를 목적으로 음식점을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할머니를 만난다. 공장에서 생산된 가공식품이야 어느 부분 할 것 없이 맛이 일정하지만, 육류·생선·채소 등은 사정이 다르다. 종류, 계절, 크기에 따라 맛있는 부위가 따로 있다. 손님에게 어느 부위를 낼 것인지는 오로지 요리사의 칼끝에 달렸다. 상대의 목적을 간파한 요리사의 칼끝은 언제나 가장 맛있는 부위를 향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취재 덕을 보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이맘때 먹은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갈치구이 한 토막이다. 1kg에 육박하는 큼지막한 제주도 성산포산 생갈치 한 마리를 가져온 주인장은 그 찬란한 은빛을 자랑만 하고 다시 거둬 갔다. 그러고 나서 잠시 후 갈치 한 토막을 구워 내왔다. 주인장이 야박하다고? 천만의 말씀. 나는 주인장의 세심한 배려와 통 큰 배포에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노릇노릇 구운 가을 갈치](http://health.chosun.com/site/data/img_dir/2015/10/21/2015102101021_0.jpg)
싸락눈마냥 사르르 녹아내리는 그 맛에 시험 들다
여기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갈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모양이 긴 칼과 같다. 입에는 단단한 이가 촘촘하게 늘어서 있다. 물리면 독이 있다. 맛이 달다'고 기록되어 있다. 칼처럼 생겨 검어(劍魚) 또는 도어(刀魚), 허리띠 같아서 대어(帶魚), 칡넝쿨처럼 길어서 갈치(葛侈)라고 불렀다. 칼이든 허리띠든 칡넝쿨이든 가늘고 긴 생김새를 나타낸 것은 똑같다. 이름이 다양하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그만큼 흔한 생선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갈치는 비늘이 없는 대신 몸통이 온통 은빛을 내는 흰색가루로 덮여 있다. 늘씬한 자태를 감싸고 있는 은백색의 화려한 색깔이 매력이라 '은갈치'라 한다. 허나 상처를 입거나 은빛이 벗겨지면 이내 검게 변한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은 죽어서도 아름다워야 상품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래서 은갈치는 낚시로 잡아야 한다. 그물로 잡으면 갈치끼리 부닥쳐 색이 검게 변하는데 이를 '먹갈치'라고 한다.
연중 잡히지만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잡은 가을 갈치의 맛이 가장 뛰어나다. 수온이 내려가면 월동 준비를 위해 먹이를 충분히 섭취해 살이 도톰해지고 기름이 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을에 제주도 성산포 근해에서 낚시로 잡은 은갈치를 최상품으로 친다.
최상품에도 등급이 있다. 가장 대중적인 제주 은갈치의 크기는 10kg 한 상자에 33마리가 들어간다. 한 마리당 중량이 300g 정도 되고 시중에서 흔히 판매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10kg 한 상자에 11~13마리가 든 것이 있다. 이 정도 크기의 갈치는 특대형으로 분류되며 한 마리당 중량은 800g 이상이다. 특대형으로 분류되는 갈치는 제주도에서 어획되는 은갈치 중에서 3% 정도에 불과하다. 어획량에 따라 마리당 3만~5만원 정도 가격으로 판매된다. 명절 선물용으로나 어울리지 저녁 밥상에는 올릴 엄두가 나지 않는 물건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주인장은 이 계절에 가장 맛있는 제주 은갈치를 그것도 고작 3%밖에 잡히지 않는 특대형을, 그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부위인 뱃살이 있는 한 뼘 정도만 구워서 대접한 것이다. 주인장은 나를 시험에 들게 했고, 나는 몇 마디 감탄사로 시험을 무난히 통과했다.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표면을 젓가락으로 살포시 누르니 기름이 자글자글했다. 갈치 가시 발라내는 순서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통통한 가운데 살점을 큼지막하게 떼어내 입으로 가져갔다. 짭조름한 살점이 장독 뚜껑에 내려앉은 싸락눈마냥 사르르 녹아내렸다. 무심하면서도 마음을 당기는 맛. 그것으로 끝인가 싶은 순간, 고소한 기름이 오랜 여운을 남겼다. 갈치 한 토막을 먹는 내내 할머니가 옆에 앉아 계신 것 같았다.
누군가를 대접한다는 것은 최고가 아닌 최선이다
원재훈 작가의 음식 에세이집 <내 인생의 밥상>에서는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에게 원고 청탁을 하러 가서 얻어먹은 밥 한 끼를 소개하고 있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다 가신 선생은 멀리서 찾아온 손님에게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를 내어주셨다. 특별한 대접이라고는 간장에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주면서 미소를 지은 것이 전부다. 하지만 작가는 그때 비로소 쌀밥과 간장의 절묘한 맛을 체험했노라 회상한다.
누군가를 대접한다는 것은 최고가 아닌 최선이다. 자신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마음은 충분히 전달된다. 내게는 갈치 한 토막이 그랬고, 원재훈 작가에게는 간장 한 종지가 그랬다.
올해는 제주도의 갈치 어획량이 예년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자고로 귀할수록 그 가치를 발하는 법. 오늘 저녁 밥상에는 갈치구이 한 토막 올려보면 어떨는지. 이왕이면 당신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큰 것으로!
음식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고 추적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맛 칼럼니스트. 현재 건국대 아시아콘텐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며, 페이스북에서 '여행자의 식탁'이라는 페이지를 통해 대중에게 맛깔 나는 맛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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