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교과서에 명명된 증후군은 그냥 질병처럼 생각해도 된다. 전문가들이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고민할 만큼 어느 정도 체계화되고 연구가 이뤄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현상의 이름이 붙은 증후군, 신기한 증상에 신화나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을 붙여 그럴듯하게 만든 증후군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PART 1. 사회현상이지만 정신건강에 영향
증후군과 의학은 뗄 수 없는 관계
심리적 문제의 원인 파악하는 데 도움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환자의 상당수는 크고 작은 사회현상에서 유래한 심리 문제를 안고 있다. ‘종말론’이 대두될 때는 특정 종교집단에 빠져 버린 자녀 때문에 가정이 와해되는 경우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 때는 직장에서 감원 대상이 될까 봐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았다. 특정 기업 등의 비리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면, 연루된 사람은 자신의 비리가 파헤쳐질까 봐 불안해했다.
이런 사회현상이 ‘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 사회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면 언론 매체 등은 이를 설명하기 쉽도록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대표적 예가 ‘신 샌드위치증후군’이다. 일에 매진하는 게 가장의 미덕이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직장과 가정을 모두 챙기는 게 바람직한 것으로 문화가 변하고 있다. 이 탓에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압박감을 받는 가장이 많아지자 그들의 우울·불안 심리를 반영한 신 샌드위치증후군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따라서 증후군을 분석하면 심리 문제의 원인을 추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신도 몰랐던 정신질환 발견하는 계기 될 수도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환자 중 상당수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깨닫고 진료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증후군이라는 게 자꾸 나타나고, 이에 대해 ‘혹시 나도 이 증후군일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진료실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증후군의 일부는 그 자체로 정신건강의학과 질환의 한 증상이기도 하므로, 증후군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이 되면 그 질환을 초기에 발견해 조기 치료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 중에 이런 사례가 꽤 있다. 얼굴 성형을 중독 수준으로 자주 하던 한 여성이 언론 매체를 통해 ‘스탕달증후군(명작·연예인 등을 보며 자신의 외모를 비관해 자괴감에 빠지는 것)’을 접한 뒤, 혹시 자신이 스탕달증후군이 아니냐며 병원을 찾은 적이 있다. 이 여성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어떤 주부는 20여 년간 결혼 생활을 힘들게 만든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우연히 언론에서 ‘오델로증후군(특별한 이유 없이 배우자나 연인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는 것)’을 접한 뒤 그제서야 ‘아, 이제껏 나를 힘들게 한 남편의 행위가 의처증에 의한 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아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은 적도 있었다.
정신질환의 前단계일 수도
증후군에 해당된다고 해도 대부분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증상이 심하지 않다. 하지만 증후군을 방치하면 정신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스마일마스크증후군(화가 나거나 슬플 때도 무조건 웃는 것)’이다. 항상 친절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본심을 숨기다 보면 아무리 싫어도 웃는 얼굴로 지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결국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
- ▲ 화가 나고 슬퍼도 늘 웃는 낯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다. '스마일마스크증후군'일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질병 밝히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밑거름
증후군을 살피는 것은 질병을 밝히고 진단명을 만드는 과정의 첫걸음이다. 정신의학적 진단명을 만들어서 교과서에 싣고, 전 세계 전문의가 이를 토대로 진료하기까지 수많은 연구와 시간이 필요하다.
시대에 따라 특정한 사회·문화적 현상이 발생하면 이 문제를 정신병리현상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수의 전문가들에 의해 특정 현상이 의학·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정신병리 현상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바로 진단명으로 등재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기존 진단명 안에 해당하는지 여부도 연구가 필요하다. 기존 진단명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별개의 독립된 진단으로 내려질 수 있는지 장기간 연구를 통해 정하게 된다. 따라서 증후군을 잘 살피면 그 시대 공통의 정신건강학적 문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다.
희망과 용기 불어넣는 계기 되기도
증후군은 질병 상태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대표적 예가 ‘김연아선수증후군’이다. 김연아 선수의 무대 위 화려한 모습은 실수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혼신을 다한 노력의 결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김연아 선수를 동경하는 청소년이 동기를 부여받고 열정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황원준
황원준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 경인여자대학 사회복지학과 강사로 근무하고 있다.
도래미 상담치료센터 대표이며 (주)한국정신건강연구소 소장 겸 대표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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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일시적 심리 상태를 병으로 착각
집단 건강염려증 위험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증후군에 현혹되지 않아야
‘명절증후군’, ‘번아웃증후군’, ‘파랑새증후군’, ‘(미생)오과장증후군’, ‘중2병(이 경우 노골적으로 ‘병’이라 불린다)’처럼 의학계 밖에서 출현하는, 마치 병적인 이상 상태를 의미하는 듯한 증후군이 많다. 이런 증후군은 고통스러운 체험을 포함한 주·객관적 증상과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의학적 증후군과 비슷하기 때문에 ‘유사증후군’이라 부를 수 있다.
유사증후군은 과학적·의학적으로 충분히 검증이 안 된 것이다. 유사증후군은 특정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심리 반응이나 원래 모든 사람이 힘든 상황에 직면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정상적인 심리 반응에 이름만 갖다 붙인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유사증후군을 병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럴듯한 유사증후군을 접한 사람 중 상당수가 질병처럼 지각한다는 것이다. ‘혹시 나도 이 증후군에 걸린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의심은 오히려 스트레스나 불안, 자괴감 같은 정신적 고통을 증가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정신 질환에 걸린 것도 아닌데 마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건강염려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 ▲ 번아웃증후군.(미생)오과장증후군은 의학적 증후군이 아닌 '유사증후군'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증후군을 질병처럼 지각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나 불안 등이 가중될 수 있다.
"오과장증후군ㆍ중2병ㆍ명절증후군...
의학적 검증안 된 일시적인 심리상태
아무 문제도 없는데 질병 생긴 듯 착각"
상술에 이용되기도… 언어 유희에 흔들리지 말아야
증후군은 이미 의학이 독점하는 용어가 아니다. 사회·문화적 현상에 붙이기도 하고, 부정적 증상을 뛰어넘어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단어로까지 쓰인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여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교황증후군(프란치스코 교황이 사회적 약자 등에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던 선한 행보를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증후군의 의미가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다. 증후군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원래 의학계인데, 의학이라는 체계화된 틀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제대로 된 정의와 단어가 가진 의미를 잃고 여기저기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심리학자나 사회학자가 진지하게 관찰할 만한 의미 있는 사회현상에 쓰이는 반면, 소비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상품처럼 개발되는 경우도 생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피노키오〉가 그 예다. 피노키오증후군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소재로 시청률과 수익을 성공적으로 ‘생산’해 낸 것이다.
그래서 의학 밖 영역에서 쓰이는 ‘증후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아예 정의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현재로서는 ‘실재하는 어떤 현상’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지만, 실재하지 않는 창작의 예도 이미 있다. 수많은 현란한 상품의 유혹 속에서 영위해 나가는 현명한 소비활동처럼, 무수한 증후군 정보의 홍수 속에도 현명한 양분 섭취가 필요하다. 감각적 자극을 일으키는 얕은 언어적 유희에 마음이 흔들릴 필요는 없다. 허위과장 광고와 같은 증후군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 우리를 자극할 것이다.
의학적 증후군과 유사증후군 구별하려면
- ▲ "나는 죽었다. 나를 영안실로 옮겨 달라."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시체 증후군'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학적 증후군과 유사증후군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증후군이란 단어 앞에 사람의 이름이나 의학용어가 붙는다면 의학적 증후군인 경우가 많다. 의학적 증후군의 상당수는 최초에 그 질환을 기술한 의학자 이름 또는 환자 이름을 따서 붙이기도 했고, 가장 핵심적 증상이나 신체기관의 병리 뒤에 붙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반면 문화적이고 대중적인 용어에 붙은 증후군은 유사증후군인 경우가 많다. 유사증후군은 합리적 대처와 적응을 요하는 것이지 의학적 처치를 요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 있다.
의학적 증후군의 문제점도 있어
증후군 용어 사용의 문제는 유사증후군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의학 분야의 증후군 사용에도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의학 내 있는 증후군만 해도 너무 많다. 그래서 이를 체계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아직 고안하지 못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대두하는 중대한 의학적 상태를 ‘증후군’이라 명명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더욱 많은 증후군이 출현할 것이다.
셋째, 새로이 제안된 증후군은 타당성에 관한 논란, 진단법과 치료법 개발 등 일련의 후속된 의학적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이런 의학적 파장에는 오진, 불필요한 검사, 약물남용 등이 포함되며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지불될 수 있다.
넷째, 의사를 포함한 보건 인력은 늘 새로운 증후군에 관한 정보를 학습하고 임상현장에서 검증해 나가야 한다.
다섯째, 증후군의 범위를 설정해야 하는 중대한 의학적 질문이 해결되지 않은 채 쌓여 가고 있다. 예를 들면 ‘히키코모리증후군은 단일한 질병인가, 아니면 기존 우울증이나 성격장애로 설명될 수 있는 상태인가’ 같은 질문이다. 증후군 종류가 수없이 많고, 증후군이 단순한 신체 조직의 병리가 아닌 사회·문화적 변화와 거기에 적응하는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가 복잡한 양상으로 얽혀 있는 탓이다.
‘증후군'이란 용어는 고대 히포크라테스 시절부터 존재했지만, 의학적 질환의 명명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20세기 중반 무렵이다. 의학적 기술이 발전하면서 수많은 병리적 상태가 관찰되고 보고됐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질병을 명명하고 구분하는 체계에는 혼란과 어려움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동명이인의 의학자에 의해 서로 다른 질환이 동일한 증후군으로 명명되거나, 동일한 질환이라도 학파나 지역에 따라 다른 병명을 갖기도 했으며, 핵심 증상 뒤에 붙인 병명은 때로 너무 길어지기도 했다.
한 의학사전에 의하면, 증후군은 평균 3개의 동의어가 있고, 심지어 50여 개의 다른 이름이 있는 질환도 있었다고 한다. 해마다 수십에서 수백 종의 증후군이 제안되고 있다.
- ▲ 하태현
하태현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박사이며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 정신과 방문조교수로 활동했다. 오산시정신건강증진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국제조울병학회 한국지회 학술이사다
※ Special Report:증후군 홍수시대
피노키오증후군·무드셀라증후군… ‘증후군’ 홍수시대! 질병일까, 사회 현상일까
Chapter 1. 증후군, 그 정체는 무엇인가
Chapter 2. 증후군 올바로 이해하기
Chapter 3. 다양한 증후군과 치료법
/ 기획·글 김하윤 기자 khy@chosun.com
/ 사진 조은선 기자, 헬스조선 DB
월간헬스조선 2월호 (86페이지)에 실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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