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암환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병원을 옮길 것을 고민한다. 수술 등 치료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치료 중에도 경과가 나쁠 때, 진단 결과를 믿고 싶지 않을 때, 의료진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등 그들이 하는 고민에는 저마다의 고통과 두려움이 깔려있다.
그러나 막상 병원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정해진 표준 치료가 있고, 병원의 시스템은 사실상 ‘거기서 거기’일 것이라는 막막함이 발목을 잡는다. 어디 그뿐이랴. 의료진의 태도마저 ‘다른 병원이라고 좋을까’ 싶다. 이렇게 의심과 불신이 커지면 환자는 환자대로 치료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없고, 보호자는 보호자대로 환자의 간병에 충실할 수 없어진다.
만약 정말 병원을 옮기고 싶다면, 다음의 조언을 신중히 읽고 실천해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우선 현재의 의료진과 충분히 상담해 본 후 결정한다
가장 좋은 것은 현재의 의료진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사실상 암은 세계적으로 표준 치료 등이 거의 정해져 있고, 치료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잡혀 있어 병원마다 다른 치료가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때문에 가능하다면 지금의 의료진에게 걱정되는 부분을 털어놓고 해결법을 함께 찾아보는 것이 좋다. 외래나 회진 시간에는 바쁠 수 있으므로 미리 스케줄을 물어 여유 있는 시간을 이용해 걱정되는 부분에 대해 지금의 의료진과 충분한 상담을 하도록 권한다.
◆ 기록을 모두 가져간다 해도, 치료가 늦어질 수 있다
병원을 옮기기만 하면 걱정이 모두 사라질까? 아니다. 옮기는 병원에도 환자는 많고, 정해진 순서가 있다. 이것은 별도로 암센터를 두고 있는 대학병원 등 큰 병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치료가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환자는 계속 병을 앓고 있지만, 새로운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우선 외래 일정을 잡는 것만 생각하더라도 쉽지 않다. 또한 다른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를 모두 가져오더라도 기본적으로 병원을 옮기면서 다시 확인해야 하는 절차가 있다. 예를 들어 영상 사진이나 병리학적 소견은 대부분 새로운 병원에서 재확인 절차를 거친다. 이를 기다리는데 당연히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새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도 번거로움이 많다. 대형병원이라면 언제나 입원을 기다리는 환자가 많아 별다른 치료를 못하고 시간을 낭비할 우려가 있다.
◆ 항암치료 중에는 병원을 옮기는 시기를 잘 선택한다
어떤 치료든 도중에 병원을 옮기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 중에서도 항암치료 중에 병원을 옮기는 것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항암치료는 대개 의료진이 현재의 암세포 크기와 상태, 환자의 컨디션 등을 고려해서 횟수를 정하고 시작한다. 종종 진행 중에 약이 듣지 않아 약물을 바꾸는 환자도 있지만, 크게 문제가 없다면 계획한 치료는 모두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의 항암치료는 2-3 주기마다 CT 검사를 시행한다. 만약 항암치료 후 약의 반응을 확인하기 전이라면 새로운 병원에서도 치료가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예외적으로 빨리 확인을 해야 하더라도 새로운 병원에서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가급적 항암치료 후 반응을 확인 후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무작정 퇴원부터 하고 새로운 병원을 찾기 보다는 옮길 병원에서 미리 외래 상담이라도 받은 후 결정하는 것이 좋다.
◆ 현재 병원의 검사 및 진단 기록, 의사의 소견서를 꼭 챙겨간다
사실상 이전 병원의 모든 기록을 챙겨야 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X-선, CT, MRI 등 영상검사기록과 의무기록, 이전 진료하던 의사의 소견서가 꼭 필요하다. 3차 의료기관으로 옮길 때는 진료의뢰서 또한 필요하지만, 응급실로 방문할 때는 생략할 수도 있다. 현재 무슨 약을 복용 중인지 처방전도 가져오는 것이 좋다. 담당 간호사에게 필요한 서류를 말하면, 발급처나 서류 발급에 필요한 내용 등을 미리 알 수 있다.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고 빠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소견서가 가장 중요하다. 소견서는 담당 의료진이 방대한 기록을 의학 용어로 정리 해둔 서류이기 때문에 짧고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짧은 외래 진료실에서 정리되지 않은 방대한 자료를 내민다면 담당 의료진이 난감해진다. 현실적으로 환자와 가족의 말, 사진 몇 장 만으로 상황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 잘 정리된 소견서는 환자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치료 계획을 세우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의사도 시간적 부담이 적어야 환자에게 친절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옮길 때는 좋은 인상을 남겨라
옮길 때는 불미스러웠던 일은 되도록 잊고 좋은 인상을 남기며 나오는 것이 좋다. 서류를 다시 발급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이유에서건 병원을 다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병세가 좋아져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으나 상황이 악화돼 다시 큰 병원에 오게 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또 한때나마 자신을 혹은 가족을 치료해 준 의료진에게 나쁜 인상까지 남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디에서든 그렇지만, 급한 마음에 뭐든 빨리빨리 해달라고 한다거나 목소리부터 크게 내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너무 많은 병원을 옮겨 다니는 것도 자제하도록 한다. 쇼핑하듯 너무 여러 번 병원을 옮긴다면 ‘내 의사’ 또는 ‘내 환자'라는 서로에 대한 소속감이 생기기 어렵다. 성공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가 필수적이다.
◆ 병원을 옮겨야 하는 경우는?
‘병원이 너무 멀어서 라든가’, ‘무리한 치료를 받고 싶지 않아서’와 같은 이유로 병원을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
암환자들은 큰 수술 등 비교적 중대한 치료를 제외하고, 간단한 치료는 가급적 집 근처의 가까운 병원에서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는 특히 약물 부작용 등으로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니던 병원에 오느라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이 근처 병원에서 진료를 볼 수 있어 효과적이다. 이렇게 다니면 인근 병원에서도 환자의 상태를 미리 파악할 수 있어 위급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암이 많이 진행돼 호스피스 기관으로 옮기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진행암 환자의 삶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전문적이고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호스피스 기관은 이런 상황에 특화된 병원이다. 병이 나빠져 새로운 치료를 위해서 옮기는 방법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빠진 상황에도 나를 돌봐준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때에는 과감한 선택이 필요할 수 있다.
이상의 조건을 충분히 고민하고 검토했다면, 병원을 옮겨 다른 진료를 받아보자. 그러나 이 순간 환자와 보호자인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의료도 광범위한 의미에서는 ‘서비스’라는 것이다. 이는 곧 환자와 보호자는 의료서비스를 소비하는 소비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병원은 두려운 공간이고, 의사의 어려운 설명은 환자와 보호자를 주눅들게 한다. 그러나 작아지지 말자. 환자와 보호자는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고 누릴 수 있다.
△ 작성: 나임일(원자력병원 혈액종양내과 과장)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수련을 마쳤다. 단순히 암을 치료하기보다 환자와 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올바른 치료방법의 선택을 돕는 조력자를 꿈꾼다. 2012년 한국임상암학회 보령학술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제 가족이 암이래요>가 있다. 현재,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교육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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