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은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흔한 암이고, 간암 사망률은 OECD 국가 중 우리가 가장 높다. 간암의 가장 큰 원인은 B형간염이다. 국내 간암 환자 4명 중 3명은 B형간염에서 암이 비롯된다. 따라서 간암을 잡으려면 B형간염을 치료해야 하지만 현재의 의술로는 한번 감염된 B형간염 바이러스를 없애지 못한다. 그 대신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하는 약을 쓴다. B형간염 치료제가 사실은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하는 약이다.
- ▲ B형 간염 전자현미경 사진(사진=미국질병통제본부)
국내에서 B형간염 치료가 가능해진 건 불과 20여 년 전인 1992년 ‘인터페론알파’ 주사제가 도입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사실상 ‘불치병’으로, B형 간염에 걸리면 우루사 같은 간기능개선제를 먹으면서 바이러스의 공격에 버틸 힘을 조금이라도 키워 보는 게 전부였다. 인터페론 알파 도입으로 시작된 B형간염치료제와 바이러스의 대결은 ‘내성과의 싸움’이라는 전선(戰線)에서 장기전을 벌이고 있다. 몇몇 약은 바이러스에 판정승을 거두고 있고, 일부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또 일부는 바이러스에 무릎을 꿇었다.
왜 내성과의 싸움을 쉽게 끝내지 못할까. B형간염 바이러스는 워낙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성은 바이러스의 자기복제 과정에서 생기는 일종의 돌연변이다.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복제 과정에서 스스로 검증하면서 잘못 복제된 부분을 수정하는데, B형간염 바이러스는 검증 과정이 없어 잘못 복제돼도 그냥 살아남는다. 다른 바이러스는 치료제의 공격을 피하는 내성(돌연변이)이 생기면 자기 검증 과정에서 약이 듣던 원래 형태로 고쳐지는데, B형간염 바이러스는 내성이 생긴 대로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내성 바이러스는 간세포의 핵 안에 숨는다. 치료제는 세포질(과일로 치면 과육)까지는 공격하지만, 핵(가운데 씨 부분)은 뚫을 수 없다. 핵이라는 요새 안에 숨은 내성 바이러스는 계속 복제되면서 수를 늘린다.
전쟁에 투입된 첫 번째 무기던 인터페론 알파는 ‘첫 B형간염 약’이라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약효가 좋지 않고 부작용이 많았다. 인터페론 알파는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도 치료 효과가 25~40%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 수치는 서양인에 해당되는 것으로,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은 이보다 치료 효과가 떨어진다. 주사를 맞으면 발열·근육통 같은 부작용이 잘 생기고, 피로·두통·우울증·갑상선 이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인터페론 알파는 지금은 B형간염에 쓰지 않고 C형간염에 쓴다. C형간염 바이러스는 인터페론 알파를 주사하면 박멸되기 때문이다.
먹는 항바이러스제가 국내에 첫선을 보인 건 7년 뒤인 1999년이다. 영국 제약사 GSK가 개발한 ‘제픽스’가 도입된 것인데, 시작은 좋았다. 인터페론보다 부작용이 적었고, 12개월 복용하면 B형 간염 바이러스의 활동이 90% 이상 억제됐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내성이 심하게 발생했다. 1년 내성률은 14~43%고, 5년 내성률은 60~70%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건강보험이 약값을 1년만 지원하는 바람에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B형간염치료제는 장기간 써야 바이러스가 효과적으로 억제되는데, 이 약을 먹던 환자들이 건강보험 지원이 끊기는 1년 뒤부터는 약을 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약과 싸우는 과정에서 바이러스는 더 독해져서 나중에 더 심한 증상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GSK는 2004년 다른 성분으로 제조한 치료제 ‘헵세라’를 2004년 우리나라에 출시했는데, 이 약은 처음부터 제픽스에 내성이 생긴 환자의 병행요법(두 가지 약을 함께 쓰는 것)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헵세라도 5년 내성률이 20% 선에 달해 다제내성(여러 약에 동시에 내성이 생기는 현상) 문제가 발생했다. 제픽스와 헵세라가 나쁜 약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두 약은 간암의 발생률과 사망률을 줄이는 데 나름 기여했다.
- ▲ B형간염 치료제 관련 사진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치료제도 있었다. 부광약품은 독자기술로 개발한 ‘레보비르’를 2006년 출시했다. 바이러스 억제 효과가 우수하고, 약을 끊어도 효과가 지속돼 처음엔 각광받았다. 하지만 임상시험이 부실해서 약효에 대한 설득력이 높지 않았고, 출시 3년 뒤에는 이 약이 근무력증을 일으킨다는 보고가 나와 입지가 좁아졌다. 현재는 거의 쓰지 않는다.
2007년에는 내성을 획기적으로 줄인 ‘바라크루드(BMS)’가 나왔다. 바이러스억제율 94%, 6년 누적 내성발생률 1.2%라는 임상시험 결과를 내세웠다. 출시 이후 각국에서 실제 처방받은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는 임상시험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 바라크루드는 사실상 B형간염치료제의 춘추전국시대를 제패했다.
2009년 국내에 나온 ‘세비보’(노바티스)는 비운의 약이다. 약효가 나쁘지 않고 다른 약과 달리 임신 중인 여성이 먹어도 될 만큼 안전했지만, 국내에는 바라크루드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2년이 지나서 들어오는 바람에 바라크루드가 장악한 시장을 뚫고 제대로 들어가지못했다.
바라쿠르드의 독주에 견제구를 던지며 등장한 강력한 경쟁자가 ‘비리어드’ (길리어드)다. 2012년 국내에 나온 이 약은 임상시험 중에 내성이 생긴 환자가 한 명도 없었다. “2008년 미국에서 처음 출시된 이후 전 세계 처방받아 복용하는 환자 중에 내성이 생긴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제조사는 집계한다. 바라크루드와 비리어드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잘 안 생기는 부위를 공격하기 때문에 내성이 거의 없다.
먹는 약의 경쟁 속에 인터페론 주사도 2007년 부활했다. 기존 인터페론 알파의 효과는 높이고 사용법은 개선한 페그인터페론 알파 주사제인 ‘페가시스(로슈)’, ‘페그인트론(MSD)’이 국내에 출시됐다. 이 주사제는 1주일에 한 번만 맞으면 되고, 1년 정도(48주)만 쓴다. 내성이 없는 장점이 크지만, 1년이 지난 뒤 간염이 다시 심해지면 먹는 약을 써야 한다. 현재 대한간학회가 B형 간염이 발병했을 때 처음 쓰도록 권고하는 치료제는 페그인터페론 알파 주사제, 바라크루드, 비리어드 등 세 가지다. 환자의 상태와 바이러스 활동 특성, 식사습관 등에 따라 치료제를 정한다.
‘내성 없는 바이러스 억제’라는 숙원을 거의 달성한 의료계의 다음 목표는 ‘관리를 넘어서는 완치’다. 아직 초기단계지만, 의미 있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올해 열린 미국간학회에서 ‘비리어드로 바이러스를 억제한 후 페가시스로 면역치료를 하면 일부 환자의 체내에서 B형간염 바이러스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또 다국적 제약사들이 계속 B형간염 치료백신과 먹는 면역치료제 등 다양한 약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10년 안에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 ▲ B형간염 치료제
월간헬스조선 8월호(150페이지)에 실린 기사임
/ 강경훈 기자 kwkang@chosun.com
도움말 안상훈(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교수), 임영석(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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