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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 정관진 제2군단/암정보

[스크랩] 암을 극복하는 정신적인 힘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11. 10. 25.

[김철중의 생로병사] "당신, 암 걸렸다"는 소식 잘 전하기

입력 : 2011.10.24 23:29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의사

"예전엔 '나쁜 소식' 가족에게 먼저 알렸으나

요즘은 환자 본인에게 전해

암 통보받고 급사하거나 공황발작 일으켜

정신과 치료받기도

단계 순차적으로 높여 충격 소화할 시간 주고

따뜻한 자세로 희망 줘야"


어느 날 자신이 암(癌)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환자 입장은 매우 고통스럽다. 이제 암은 누구나 앓고 잘 낫는 만성질환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암 생존율은 60%대 수준이다. 절반을 조금 넘을 뿐이다. 물론 조기발견하면 완치(完治)될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설사 암 생존율이 90%라고 해도 나머지 10%에 속하는 이들에게 그 수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전히 암은 공포·분노와 함께 다가온다.

의사들에게도 "당신, 암 걸렸다"고 말해야 할 때는 난감하다. 더욱이 말기 상태가 됐다든가,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때라고 전해야 하는 순간에는 의사도 심적 스트레스를 크게 느낀다. 과거에는 '나쁜 소식'을 환자보다 가족에게 먼저 알리고, 그 얘기가 환자에게 에둘러 전달되도록 하는 게 흔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환자가 의사한테 직접 듣기를 원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자기 삶에 관한 것은 자기가 듣고 직접 결정하겠다는 당연한 생각에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렇다고 환자에게 모든 사실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병원 의사들의 경험과 각종 사례 연구에 따르면, 나쁜 소식을 전할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 평소 두터운 신앙심을 보이며 매사를 이성적으로 대하던 의대 교수가 말기위암이라는 말을 듣고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다가 몸부림치듯 죽음을 맞은 경우도 있었다. "나는 덕(德)을 오랫동안 닦아 온 사람으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니 바른 대로 병세를 알려달라"는 한 수도자의 말을 믿고 말기암 사실을 곧이곧대로 알렸더니, 정신적 쇼크에 빠져 며칠 만에 급사한 사례도 있다. 갑작스러운 폐암 통보에 환자가 충격에 빠져 공황발작을 일으켜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죽은 경우도 있다.

반면 평소 종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사람이 자신의 암이 더 이상 치료가 안 될 상황이라는 말을 듣자, 종교에 입문하여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했던 잘못을 용서 구한 뒤 생을 마감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항암제 치료가 죽기보다 싫다며 훌쩍 여행을 떠난 부자도 있고, 없는 살림에 끝까지 지푸라기라도 붙잡은 이들도 있으니, 그런 게 각자의 삶이자 인생이지 싶다. 때론 환자의 자녀가 "부모님에게 왜 암이라고 먼저 말했느냐?"며 의료진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 때문에 위암은 위궤양으로, 담관암은 담석증으로 순화되고, 말기는 초기로 낮춰진다.

'나쁜 소식'에 대한 저마다 다른 반응과 입장 때문에 최근 의학교육에서는 '나쁜 소식 잘 전하기'를 가르친다. 환자와 가족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고, 다음 대책을 잘 마련해 보자는 취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우선, 환자를 책임지는 담당 교수나 전문의가 둘만의 공간에서 말해야 한다. 레지던트를 시키거나 그 환자를 자주 접하지 않았던 의사가 대신 통보하는 것은 곤란하다. 솔직하면서 인간적인 자세로 말해야 하며, 반드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대안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나쁜 소식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올려가는 것도 환자가 충격을 소화할 시간을 갖게 하는 요령이다. 의사가 한 유방암 환자에게 전후 사정없이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통보했더니, 그동안 고분고분했던 환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며 쌍욕을 해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록 아쉽게도 암이 재발했지만, 요새는 의학이 발달해서 열심히 치료받으면 자기 수명을 다 살 수도 있으며, 제가 끝까지 최선을 다할 테니 희망을 가져봅시다"라고 말하는 게 의사의 기본태도이다. 현대 의료 체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환자로 태어나 환자로 죽는다. 그러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인간미가 흘러야 한다.

나쁜 소식을 잘 전하는 목적은 거대한 질병의 파도 앞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은 환자에게 투병 의지를 북돋기 위함이다. 잘 훈련된 군인이 있어도 사기가 떨어지면 전투에 지기 마련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사들의 사기를 충만시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훌륭한 장수의 덕목이듯이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항암제도 환자의 투병의지만 못하다. 더는 할 게 없는 상태라면 환자가 가능한 한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배려하는 것도 의료인의 중요 임무다. 인생의 마지막을 뒤늦은 충격 속에서 허둥대다 끝낼 순 없지 않은가.

서로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어디 의사와 환자 관계뿐이겠는가. 전쟁터에서 총을 맞은 병사가 당장 미워하는 것은 적군이 아니라 빨리 달려오지 않는 위생병이라는 의료계의 격언을 누구나 새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