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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 정관진 제2군단/크리에이터 정관진 저작권 글

{스크랩}자연의학과 식(識)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11. 10. 25.

자연의학과 식(識)

 

(지금여기 12-4호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  *그냥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냐(객관적 존재론)’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물음은 2천 5백년 이전에 일이다. 없다가 어느 날 생긴 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들이 바로 서양철학의 역사이며, 최소한 헤겔 이전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철학이 체계로서 존재할 때까지). 동양에서는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주관적 인식론)’라는 물음이, 물음 겸 답의 형식으로 소위 화두처럼 주어진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는 감관(感官)과 그것을 해석하는 체계인 식(識: 의식, 무의식, 집단무의식)이 없다면 무엇이든 있을 수 없다. 반대로, 밖에 어떤 것이 없어도 적당한 주파수의 전기 자극으로 이러한 감관을 자극하면 우리 의식은 밖에 그 무엇이 있다고 생생히 느끼며 이것이 바로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은 원리적으로 완전히 가능하며, 단지 얼마나 정교하게 하느냐는 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확실히 있다고 판단하기 위해 밖에 무엇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가상현실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상태라면 모험을 즐기는 사람에게 그 장면은 스릴이 넘치는 장면이며, 반대로 이런 상황에 공포증이 있는 이라면 무서운 전율로 채색되어 경험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상현실장치가 없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어떤 장면을 상상하고 만약 그 상상한 장면이 부끄러운 것이라면 얼굴이 붉어지고 심박동이 빨라진다. 종합해보면 있다는 것은 오로지 식(識)의 활동이며, 식은 무엇이 있는 것의 결정자이자 제조자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이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의 마음(識)이며, 그러기에 마음 알기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싶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마음이라고 고정시키면, 굳어져 더 이상 아무것도 보거나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이는 모든 것이 마음이 되려면 마음은 언제나 텅 비어 있어야 한다. 눈앞에 ‘아무 것도 없어야’ ‘모든 것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유행하는 ‘같기도’의 일종으로 진공이지만 묘유이며, 또한 진공이기에 묘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본 것으로 눈이 멀고, 들은 것으로 귀가 먹는다.

 

‘오로지 마음뿐’이라는 것이 진리이지만, 현상을 사는 이들에게는 저 밖에 무엇이 없다는 것보다는,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 마음이 나름으로 해석한다는 견해가 유용하다. 아무튼 물질관에 집착된 우리는 저 밖에 소나무, 바위, 냇물, 자동차 등이 오로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우리 눈을 그렇게도 자극하는 색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방금 학생들 채점을 끝냈기 때문에 붉은 색연필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붉은 색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밤이 되어 그것을 비추던 빛이 사라지면서 색은 온데간데없어지기에 붉은 색 연필은 원래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색이란 그저 진동이며 그 진동을 망막과 뇌가 그렇게 해석하고 창작해낸 것이 색이다.

 

붉은 색연필은 비로소 내 뇌의 식(識)에 와서 태어난 것이며, 붉다는 것조차도 당신도 나처럼 그렇게 느끼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그런 색을 붉은 색이라고 배웠으며 그랬기에 그런 색을 보면 붉다고 하는 것이지, 당신도 나처럼 바로 그렇게 그 색을 느끼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당연하다고 느끼던 그 많은 것에 우리가 얼마나 속고 있었던 것인가! 우리는 이 순간 벌어지는 지금여기에 살고 있다기보다는 각자의 고정관념이 만든 그들만의 영화관 속에서 울고 웃고 사는 것이다. 그 영화관에서 밖으로 나와 실상을 보는 것이 사실은 병을 고치는 작업이고 그런 의미를 전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만약 아픈 이가 그 통증을 내 눈앞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그 통증을 부셔버릴 수 있다. 어떤 환자도 통증인 고통 그 자체를 본 적도 보여 준적도 없으나 괴로움이 너무도 크다. 상처나 고름, 세균과 바이러스, 주사바늘 자체가 통증은 아니다.

 

모두 다 결국 우리가 해석하여 만들어낸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당장 아픈데 어쩔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통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뇌가(識이) 해석한 것임을 일단 인정하자! 같은 강도의 자극에도 우울증 환자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만성 통증환자의 경우 항우울제는 드라마틱한 통증 개선을 가져온다.

 

이쯤에서 질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건강과 질병은 원래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건강을 잃었다거나 되찾았다는 말은 사실인가? 자연의 세계에 정상이나 비정상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자신의 이해 와 득실을 내세워 이기적 잣대로부터 만들어낸 것인가? 집중호우로 계곡물이 불어나 산사태가 생기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인가? 물은 그저 위에서 아래로 흘렀으며 모든 것은 자연의 원리대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이다. 독성이나 오염된 음식을 먹었기에 생명(자연)의 원리대로 위장 운동을 증가시켜 배설을 촉진하려다 보니 설사가 나고 배가 아픈 것이며 정상적 작용이다.

 

그러므로 자연이나 생명 그 자체에는 원래 비정상이나 질병이 있는 것은 아니며, 자연원리를 원리대로 100% 실천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개체에게 그런 과정이 고통스럽다면, 생명의 자연스런 과정을 막을 것이 아니라(부분에 관여), 그런 환경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전일적 접근).

 

그러나 오늘날 그런 ‘결과적 과정만’을 질병이라고 부르며 의학은 그것을 막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인위(부분적 방편)가 자연(전일적 목적)을 막을 수 없음은 당연하며 단지 시간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기계가 아닌 생명체(자연의 소산)의 치료는 반드시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치료는 시간은 걸리더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이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