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눈물겨운 그 가을이 왔다.
빨간 신호등이 초록 불빛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10월에 마지막 날. 평상시 같으면 ‘잊혀 진 계절’이라는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대고 있었겠지만, 그러나 오늘은 항암 8번 방사선치료 32번의 힘든 치료를 견뎌온 마지막 날이라는 뜻 깊은 날일뿐이었다. 기분이 날아갈 것같이 가볍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음 한편으로는 앞으로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매일 병원을 드나들며 모든 것을 의지하며 지냈는데 이제는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혼자가 된 것 같은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익숙한 솜씨로 강변도로로 차를 몰았다. 너무도 익숙한 길이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물빛에 반사되어 휘청거리는 햇살도, 노랗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도 그랬다. 지난 몇 개월 동안은 오로지 치료를 위해서 달렸던 이 길이, 반짝이는 저 강물이, 그리고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지난 2월 유방암수술을 하고 ‘가을이 올까? 올 가을이 내게 올까?’ 라고 되뇌었는데. 마침내 치료에 마침표를 찍는 그 눈물겨운 가을이 왔다.
반짝이는 수면위로 새들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가슴이 울컥하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암이라 판정받고 어이없어 하던 일이며,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 그리고 최첨단의 방사선치료, 그리고 나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내 주위사람들까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핸들을 잡고 펑펑 절규하듯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암이라 판정받던 날이었다. 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나와 내 친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오후 내내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대었다. 내일이면 친정식구들과 함께 여행가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결과를 보고 홀가분하게 갔으면 좋으련만, 며칠 전에 받은 조직검사 결과가 석연치 않아 걱정이었다.
오전에 결과를 보러 병원에 갔었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아 그냥 돌아왔다. 선생님은 연락해 주시겠다며 집에 가서 기다리라 하셨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발신표시가 없더라도 전화를 꼭 받으라는 간호사의 말을 생각했다. 그때 정말 발신표시가 없는 전화가 왔다. 전화기 속에서 약간 가라앉은 듯한 담당선생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결과가 별로 안 좋아요!”
“네? 뭐가 어떻게 안 좋은데요? 선생님!”
“음……걱정하지 말고 일단, 일단 여행을 다녀오세요. 내가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권위 있고 훌륭하신 선생님으로 연결해 놓을게 요.”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무슨 일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아련함에 빠졌다. 그리곤 이내 ‘아!’ 하는 짧은 외마디 비명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선생님은 하얗게 질린 내게 괜찮을 거라며 나를 안정시키려 애쓰셨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어떻게든 검사결과를 뒤집어 보려 애를 썼다.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가 암에 걸리리란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기에 더욱 황망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일 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아닐 거라고 우겨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앞이 막막했다. 그렇게 한바탕 울음을 쏟아내고 나니 웬만큼 진정이 되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밝고 활기차 있었다. 병원을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검사를 받아왔고, 그 덕분에 지금껏 아무 이상 없이 살아왔었다. 그날도 6개월에 한 번씩 가서 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S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익숙한 모습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계셨다. 얼굴만 봐도 내 건강을 책임져 줄 것 같은 듬직한 선생님. 그 선생님과는 일 년에 두어 번쯤 만났다. 그렇게 병원을 가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살짝 두렵기도 한 자리였다.
“음……이번엔 폐하고 대장, 그리고 유방암 검사를 좀 하시죠!”
불과 6개월 전에 검사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내게 유방 초음파검사를 하라고 권하셨다. 그렇게 검사한 초음파에 이상한 것이 잡혀 곧바로 조직검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것은 선생님의 검사 권유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병기는 유방암 2기초. 항암 8번에 방사선 32번을 해야 한단다. 초기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나마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불안한 마음이 나를 덮쳤다. 그 불안함을 아셨는지 수술을 끝낸 A선생님이 지긋하게 “암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보다 더 심한 사람들도 잘 살고 있느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불안해하는 나를 다독였다. 수술도 잘 되었고, 회복도 빨랐다. 병원에 있는 동안 절망 속에서 떨던 몸과 마음은 의료진들의 세심한 치료와 배려 덕분에 빠른 안정을 찾아갔다. 그로인해 암도 완치가능하다는 확신도 갖게 되었다.
항암치료를 위해 외과에서 종양내과로 바뀌었다. 또 어떤 선생님을 만날게 될지 궁금했다. 여러 절차를 거쳐 나는 K선생님 앞으로 인도 되었다. 선생님은 항암치료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셨다. 항암 8번, 그 만만치 않은 치료 횟수에 난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야했다. ‘그래 겨우 8번인데 뭐…….’라고 그러다가도 울컥울컥 가슴을 치고 나오는 울음에 어금니를 악물어야만 했다.
첫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내 앞에 엄청난 양의 주사가 놓여지자 나는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커다란 주사기 안에 들은 체리주스 같은 약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더니 온몸이 따끔거리며 가슴속으로 싸하게 스며들었다. 이내 속이 미식거리며 약간 어지러웠던가? 그랬다.
그날 저녁부터 항암제는 빠르게 나를 장악해 나갔다.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토악질을 해대었다. 항암제……이거 하나님이 내게 준 선물이라 생각하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래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다음날 새벽 나는 메스꺼움을 견디지 못해 물병을 들고 나지막한 뒷산으로 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걸음으로 걸음걸음마다 헛구역질을 해대며 산에 올랐다. 아직은 쌀쌀한 삼월에 찬바람이 오히려 편안하게 했다. 나는 볕이 잘 드는 바위하나를 골라 앉았다. 사방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드문드문 진달래가 피어나고 남산제비꽃이 조밀조밀 하얗게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몽글몽글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나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때다. 아버지는 당신의 친구무덤 앞에 진달래술(두견주)을 담은 항아리를 묻어두었는데, 가끔 그 술을 꺼내어 친구의 무덤위에 뿌려주며 “잘 지냈는가?”라고 묻던 아버지. 그 술잔을 앞에 놓고 우두커니 앉아 담배를 길게 내뿜던 내 아버지. 혹, 지금의 내 모습이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닮진 않았을까. 아버지가 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생각하니 또 다시 울컥 설움이 밀려왔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첫 항암치료한지 열흘이 지나자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거울 속에 푸석푸석한 얼굴을 한 내가 서 있다. 이틀 뒤면 미래수필문회에 출판기념회가 있는 날이다. 이틀만 기다렸다 빠져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이런 날을 위해 가발을 미리 맞춰놓긴 했지만, 그날만큼은 가발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제발……!”이라고 빌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래도 난 버텨냈다. 빠지는 머리를 미장원에서 스프레이로 억지로 고정시키고 행사에 참여했다. 내 소식을 듣고 안쓰럽게 바라보던 나의 스승님과 지인들, 그리고 함께 글을 쓰는 문우들 덕분에 행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눈물겨운 항암치료는 회가 거듭 할수록 힘이 들었다. 속은 더욱 미식거렸고 냄새도 민감해져 화장용품을 비롯해 목욕탕에 있는 모든 것들을 치워버렸다. 뿐만 아니라 입속은 헐어 난장판이 되어 음식물을 먹기 힘들었다. 손톱발톱이 까맣게 변해가는 것을 보며 이젠 눈물도 나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무엇을 조금만 먹어도 식은땀이 비 같이 내렸다. 나는 손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며 기분전환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 나를 위해 남편은 생전 하지도 않던 집안일을 거들었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 하나님께 머리 숙여 기도하는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 또 목회활동 하는 오빠내외는 간절한 기도를 하며 드나들었고, 군에 있는 아들만이 어쩔 수 없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했던가. 다행히 내겐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서로 돌아가면서 밥을 먹여주고 반찬을 만들어 나르고, 기도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가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항암주사를 단 한 번도 뒤로 밀리지 않고 제 날짜에 맞을 수 있었다. 속이 울렁거림과 냄새의 민감함에서 벗어나니 이번엔 근육통에 시달려야했다. 손발이 저리고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서 제대로 걷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씩은 동네 시장을 한 바퀴씩 돌기를 반복했다.
너무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여름날이었다. 나를 아껴주시는 스승님은 당신의 출판기념회 진행을 내게 맡기셨다. “수림아! 니가 사회 봐! 할 수 있지?” 선생님도 나도 유쾌하게 웃었다. 제자에 대한 선생님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나갈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려 온갖 치장을 했다. 화사하게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고, 속눈썹을 붙이고, 하이힐을 신고 최대한 예쁜 옷으로 차리고 나섰다. 더운 여름날 가발을 쓰고 다니는 것은 곤욕이었다. 그것은 치장이아니라 변장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네!”
“괜찮긴……화장해서 그렇지. 이건 변장이야! 변장! 가발 쓰고, 속눈썹 붙이고…….”
“어머! 정말 가발이야? 먼저 머리스타일하고 똑같아서 잘 모르겠어!”
나는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리가 가발인지 아닌지 살피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발이라고 말하고 유쾌하게 웃곤 했다. 이 정도면 성공이다. 전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니 당연히 성공이다. 정말인지 빈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내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부은 발을 옥죄어 오던 하이힐을 벗어던지면 나는 다시 민머리에 푸석푸석한 피부를 가진 항암환자로 돌아왔다.
시작이 있으니 끝도 있었다. 처음 나뭇가지에 푸릇푸릇 싹이 돋을 때만하더라도 까마득하기만 하던 8번의 항암치료가 긴 여름 끝에서 끝이 났다. 그 기쁨이야 격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을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신춘문예 감이 아닐까싶다. 아직 방사선 치료가 남았지만, 이제 머리도 날것이고 근육통도 조금씩 나아질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내 스스로가 해냈다는 뿌듯함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래 앞으로는 좋은 것만 기억하며 사는 거야!’ 라며 씨익 웃었다.
오늘은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는 날이다. 나는 이외수의 ‘하악하악’을 나 자신에게 선물했다. 뭔가 내안을 채우고 싶었다. 치료를 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빈둥빈둥 시간만 보냈는데, 이제는 뭔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방사선 치료실에 들어가 누우니 초록색 불빛이 내 가슴으로 쏟아졌다. 의사가 그 불빛을 따라 내 가슴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역겨운 잉크냄새가 훅하고 코를 찔렀다. 얼핏 보니 자주색? 아니, 가지색이다. “지워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의사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와 목욕탕 거울 앞에 섰다. 아직은 더위 끝이라 외출 후 돌아오면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슴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려놓은 선들은 마치 도심 한복판의 복잡한 도로 같았고, 간간히 쓰여 진 숫자와 영자는 외계어 같이 이상야릇하게 보였다. 선생님은 목욕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럼 간단히 샤워 하면 되지…….’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웃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림 그려진 부위를 빼고 비누칠을 하고 씻다가 샤워기로 그림 그려진 부위에 슬쩍 물을 뿌려보았다. 그리고 선풍기 바람에 휘휘 말려보았다. 괜·찮·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난 항암치료에 비하면 방사선은 그래도 할 만 하였다. 좋은 것만을 생각하기로 한 탓일까. 아니면 나쁜 기억은 잊고 좋은 일만 기억한다는 무르셀라 증후군에 걸린 것일까. 나는 방사선 치료도 열심히 다녔다. 특히, 방사선 치료실에서 매일 만나는 선생님들의 진심어린 관심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치료에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방사선실을 휘둘러보았다. 그렇게 거의 두 달을 드나들었지만 방사선실을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끝이 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다시 빙그르 돌았다.
“휴우~! 이제 다 끝났네요. 선생님! 여기 다시는 들어오면 안 되는 거죠?”
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자 선생님이 휴지를 뽑아 내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그렇죠.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잖아요. 다시는 오시면 안 되죠. 울지 마세요……. 잘 끝내놓고 왜 우세요. 앞으로도 관리 잘 하셔서 건강하셔야 해요.”
나는 소설 속에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이런 상황을 글로 쓴다면 어떨까 싶었다. 그리곤 이내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일들이 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 책상에 두어 권의 책을 놓고 나왔다. 그동안에 나의 삶을 책으로 엮었던 에세이집이었다.
그날 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문학회 세미나에 가 있었다. 늦은 밤 ‘띵똥’ 하고 휴대폰에 문자가 떴다. “웃는 모습이 아름다우셨던 000님! 주신 책 잘 읽겠습니다. 건강하세요. -L-”이라고 짧은 문자가 왔다.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엔 고맙고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고 했나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희망을 낚는 일뿐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는 일만이 남았다. ‘겨울의 추위가 심한 해일수록 오는 봄의 나뭇잎은 한층 푸르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의 이 시련이 앞으로 더욱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하기위한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 ‘절망의 이빨에 심장을 물어 뜯겨본 자만이 희망을 사냥할 자격이 있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소설가 이외수가 말했다. 높고 험한 산을 정복하고 내려온 사람처럼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웠다.(들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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