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기 과들, 전공 초월한 이름 걸고 영역 확대 나서
- 병원과 의원들이 외과·산부인과·피부과 등 ‘진료과목’의 간판을 버리고 있다. 진료과목 중 일부 특수질환만 두드러지게 알리거나 아예 진료과목, 질병과 무관한 이름을 내세우는 게 대표적인 예. 특히 비인기 과목을 진료하던 병원들은 경영난 타개를 위해 진료과목을 표기한 기존 간판을 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대외적 명분은 ‘진료과목 대신 환자의 요구와 편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 산부인과 → 여성병원
분만 외에 비만·피부 등 여성 관련 모든 진료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는 대표적 사례가 산부인과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저 출산국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통계청이 지난 2월 발표한 ‘2007년 출생통계 잠정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수 있는 평균 자녀 수)은 1.26명이었다. 2006년(1.13명)에 비해 다소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다른 국가에 비해 한참 낮다.
2006년 수치로 봤을 때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미국(2.10명)과 프랑스(1.98명), 영국(1.84명), 독일(1.33명)은 물론 대표적 저출산 국가로 알려진 일본(1.32명)보다 낮았다.
서울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산부인과 전문의 A씨는 “산모만 바라보고 병원 문을 열던 시절은 예전에 이미 끝났다”고 말했다. 분만 진료가 상대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병원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산부인과 병원이 분만 위주 진료를 포기하고 새로운 형태의 병원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가장 흔한 사례는 ‘산부인과’라는 진료과목 대신 ‘여성을 위한 병원’을 모토로 내거는 것이다. 여성병원(여성의원)에서는 ‘여성과 관련된 모든 진료를 해준다’고 홍보한다. 기존 산부인과가 산모를 위한 각종 진료를 포함해 요실금 치료, 자궁검사 등 주로 여성의 생식기관과 관련된 진료를 했던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유방 확대술과 피부 레이저 시술, 메조테라피(주사기로 피부 아래쪽에 약물을 주입해 지방을 분해하는 시술), 보톡스 등 간단한 성형시술까지 진료과목에 포함돼 있다. 외모에 대한 여성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진료라면 종류를 불문하고 모두 시행하는 것이다. 몇몇 병원에서는 노화방지 시술이나 동종요법(환자의 병적 상태와 유사한 증상을 유발시키는 자연약품을 복용케 함으로써 자가면역능력을 깨우쳐 스스로 치유되도록 하는 방법) 등을 진료하기도 한다.
일부 대형 여성병원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의 건강을 책임지는 소아청소년과 진료까지 겸하고 있다.지난해 10월 서울 강남의 한 여성병원에서 아이를 낳은 박모(31)씨는 “산모를 위한 진료에서부터 아기를 위한 진료까지 한곳에서 전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다양한 분만법을 산모가 직접 고를 수 있고 입원 중 태교 요령이나 임산부 체조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 점도 박씨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요인이었다.
산부인과 방문을 꺼리는 20대 미혼여성 역시 산부인과의원보다 여성의원을 선호한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여성의원에서 만난 미혼 여성 김모(26)씨와 한모(23)씨는 입을 모아 “산부인과보다 여성의원이 편하다”고 했다. 김씨는 “미혼 여성도 산부인과를 찾을 일이 있는데 산부인과에 가는 것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 불편하다”라며 “여성의원은 임신 관련 진료 이외에 피부나 비만 치료 등을 병행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씨 역시 “여성병원은 산부인과와 달리 미혼 여성이 찾아도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신경정신과 →‘마음○○○’‘행복○○’
선입견 없애고 다양한 층의 고객이 편하게 찾게
신경정신과도 ‘간판 바꾸기’ 움직임에 동참하는 병원 중 하나다.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는 ‘(신경)정신과’라는 진료과목명보다 ‘마음편해지는곳’ ‘마음과마음’ ‘굿마인드(good mind)’ 등 병원 성격을 넌지시 암시하는 이름을 붙이는 게 유행이 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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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 박상철
- 지난 3월 초 ‘행복주는의원’을 개원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재경 원장은 병원 이름에 진료과목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 “환자들이 병원을 편안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정신과 환자는 굳이 간판에 진료과목이 쓰여있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온다는 게 그의 설명. 따라서 병원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타인의 불편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덜 의식할 수 있게 하는 게 진료과목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예전에 비해 인식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신경정신과라는 용어 자체가 환자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정신과 환자뿐 아니라 내과 환자나 건강관리가 필요한 환자 등도 편안하게 찾아와 진료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밝혔다.
환자들의 반응도 괜찮은 편이다. 3월 초 우울증으로 정신과의원을 찾은 김모(48)씨는 “사람들이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실제 인식은 그렇지 않다”며 “정신과에 다닌다고 하면 아직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병원 간판이 바뀌며 문턱이 낮아져 요즘은 심적 부담이 훨씬 덜하다”고 말했다. 다이어트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에 섭식장애로 고생하고 있는 임모(25)씨 역시 “정신과 진료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주저했는데 ‘정신과’를 간판에 앞세우지 않은 병원이 생겨 비로소 치료 받을 용기가 생겼다”라며 “편안한 마음으로 병원에 다닐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
○○○의원 → ×××클리닉
비만·탈모 등 수요 많은 특정 질환 전문 강조
장사가 잘되는 특정 질환을 간판에 활용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비만 클리닉’ ‘탈모 클리닉’ ‘아토피 클리닉’ ‘알레르기 클리닉’ ‘하지정맥류 전문클리닉’ 등 하나같이 ‘클리닉’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병원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의가 병원을 공동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강동구에 있는 모 노화방지 클리닉에서는 양의사와 한의사가 병원을 공동 운영한다. 주로 노화를 고민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호르몬 균형요법, 태반주사 요법, 항산화제 요법, 유전자 검사, 생활습관 교정 요법, 통증치료 등의 진료를 해준다. 최근에는 학습장애를 겪는 청소년 환자를 타깃으로 한 ‘학습 클리닉’이나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클리닉’ ‘알코올중독 클리닉’ 등도 생겨나고 있다.
비판의 목소리
외과 검색했더니 성형외과만 줄줄이
병원과 의원의 ‘이름 바꾸기’ 현상에 대해 “병원 이름을 돈 벌기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전공 과목을 표기하지 않은 병원이 늘면서 필요한 분야를 진료하는 병원이나 의원을 정확히 찾아내야 할 입장의 환자들이 불편이나 피해를 겪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 2월 약한 화상을 입은 이모(22)씨는 외과 진료를 원했지만 병원을 찾아 한참을 헤매야 했다. “인터넷에서 외과를 검색하니 성형외과만 잔뜩 뜨더라고요. 많이 다친 건 아니어서 가까운 병원에서 진찰과 처방전을 받으려고 했는데 도무지 외과가 없었어요. ‘가족의원’이라고 된 병원에 찾아갔더니 온통 피부관리, 노화방지 관리를 받으러 온 ‘환자 아닌 환자’들뿐이고요.” 그는 “정말 아픈 환자들이 병원 이름만 보고도 쉽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 이윤아 인턴기자·서울대 중어중문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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