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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의 장/쉬어가기

아직도 남자들 대화에 ‘군대 썰’ 빠지지 않는 이유 [별별심리]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23. 2. 13.

사진=넷플릭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때쯤 어김없이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부대 행보관(행정보급관)은 말이야…”, “혹한기 훈련을 나갔는데…”, “사단 축구대회에서 내가….” 군대 이야기는 나이도 가리지 않는다. 이제 막 전역한 복학생, 민방위 3년차 회사원, 제대한지 30년이 훌쩍 지난 ‘아재’들까지, 군복 무늬만 다를 뿐 모두 어제 일처럼 생생한 ‘군대 썰’을 풀어낸다. 들어보면 그 기억이 좋은 것만도 아닌데, 매번 대화에 군대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생생한 군 시절 기억 … 한 결 같이 ‘내가 제일 힘들었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입영 통지서를 받은 날부터 전역 당일 아침 위병소를 나서는 순간까지다. 이야기에는 당시에 있었던 일들은 물론, 느꼈던 감정, 생각 등도 담겨 있다. 구체적인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듣다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느낄 수 있다. 우선 많은 이들이 당시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점이다. 수년,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주변 인물과 사건뿐 아니라, 주고받았던 말들, 먹었던 음식, 감정과 생각 등을 상세하게 떠올린다. 당시를 좋은 기억으로 간직한 사람은 대체로 성취감, 전우애 등을 느꼈다고 추억하며, 기억이 좋지 않았던 사람은 특정 인물 또는 군 시절 자체에 대해 강한 분노, 공포감, 복수심 등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 다른 공통점은 한 결 같이 자신의 군 생활이 가장 힘들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군 생활은 힘들다. 그럼에도 자신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생전 처음 훈련과 내무 생활 등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주관적인 힘듦 정도’가 누구보다 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군 생활이 남보다 덜 힘들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힘든 시기를 이겨냈던 당시의 기억과 성취감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짧은 시간 강렬했던 경험, 계속 떠올라 말하게 돼

남자들 대화에 군대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억은 생생하고 힘들수록 의도와 상관없이 오래, 깊게 남고 쉽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특히 짧은 시간 많은 일이 일어나면 더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지고 잘 되살아날 수밖에 없다. 군대 뿐 아니라 여행, 첫사랑 등과 같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다만 군 생활은 더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었고, 경험했던 사건·사고도 큰 틀에서 비슷하다보니 더 자주, 쉽게 이야기되는 것이다. 단국대 심리학과 임명호 교수는 “힘들 때는 시간이 천천히 가고 기억도 더 많이 만들어진다”며 “군 생활이라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다보면 여러 긍정적·부정적 기억이 남고, 수시로 떠올라 이야기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 군대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들이 많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인간관계는 군대 못지않게 수직적이고, 계급 문화 또한 드러나지 않을 뿐 여전히 남아있다. 군대에서 처음 계급 사회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회를 군대에 빗대어 생각·이야기하게 된다. 실제 전역 후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나와 보니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좋은 추억? 다른 이에겐 악몽일 수도… “군대·사회 동일시 안 돼”

현역 군인이 아닌 이상 어찌 됐든 군대 시절은 과거 이야기다. 지나친 군대 이야기는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좋지 않다. 계속해서 떠올리고 이야기하면 그 당시에 머물기 쉬우며, 상대방에게 ‘군대 시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 ‘군대 시절 때처럼 수직적이고 계급적인 구조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줄 수도 있다.

주위에는 자신과 달리 군대 이야기를 듣기 싫은 사람이 있다는 점 또한 인지해야 한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물론, 군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은 사람도 군대 이야기에 심한 피로감, 공포감 등을 느낀다. 나에게 좋은 추억이 다른 사람에게는 잊고 싶은 ‘악몽’일 수도 있다. 임명호 교수는 “군대와 비슷한 사회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며 “힘든 일을 이겨내고 성취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괜찮지만, 지나치게 내세우거나 사회와 군대를 동일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도 군대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눈치껏’하면 된다. 상대방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멈추고, 과시하거나 과격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 만나는 사람을 군대 시절에 비유하거나 ‘군대에 안 다녀와서 그렇다’고 말하는 등 군필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 역시 금물이다. 임 교수는 “군대 관련 예능, 드라마가 많이 나오면서 과거에 비해 군대 이야기에 관심이 높아졌다”며 “자기 과시나 공격적인 표현을 배제한 선임·후임과 즐거운 일화, 특별한 경험담 등에는 사람들도 호기심을 보일 수 있다”고 했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3/02/09/20230209008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