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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별 암/유방암

(스크랩)유방암 13년 후 대장암 말기에서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09. 10. 11.

글 | 김태월_93년 유방암, 2005년 대장암말기 판정 후 열심히 투병 중.

제 몸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가는 병원마다 의사선생님이 CT를 한번 보고, 저를 한 번 보고, 또 CT보고는 합니다. 이제는 이런저런 반응에도 덤덤합니다. 한 번으로도 충분히 지독스런 암을 두 번째 겪어내고 있으니까요. 두 번째 암인 대장암 판정이 2005년 7월이었으니 이제 2년이 되어갑니다.

‘완치’, ‘이겨내고’, ‘암이 사라져’ 등의 단어를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배웠습니다. 검사하면 수치상으로는 정상이라지만 지금도 지켜보는 중이고, 앞날은 아무도 알 수 없어 투병기를 쓰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내 몸인데 내 몸 관리를 못해 병들게 한 것이 무에 자랑이겠습니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는 것은 지난 세월동안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살고 있다고는 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간이 거꾸로 흘러 다시 그 과정을 되풀이하라면 과연 또 그렇게 해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좋았던 시간보다 힘겨웠던 시간이 훨씬 많았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첫 유방암이 발견된 것은 1993년 11월이었습니다. 다행히 0기라, 오른쪽 가슴을 보존할 수 있는 부분절제술을 받았습니다. 겨드랑이 임파절도 함께 수술했습니다. 병기와 관계없이 이렇게 수술한 유방암 친구들은 다 겪는 증상을 저도 겪었고, 지금도 안고 있습니다.

아이 둘이 너무 어렸어요. 14년 전, 그 시절 암은 지금처럼 흔하지도 않았고 정보니 식이요법이니 전이, 재발에 대한 경각심도 많지 않았습니다. 두려움과 고통만은 같았습니다.

그때 3살, 5살이었네요, 제 어린 자식 둘.

지금도 그때 일을 입에서 꺼내면 저절로 눈물이 고이고 목소리가 떨려옵니다. 제 앞가림도 못하고 아장거리는 그 나이에 엄마가 없다니, 돌봐줄 수 없다니, 엄마엄마 종일 안겨드는데 안아 줄 수 없다니, 이 어린 것들을 두고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온 천지가 아득해 왔습니다. 정말 간절히 바라고 열망하고 소원하는 유일한 기도는 애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방사선 6주를 끝으로 병원치료를 마치고 정기검진만 받으며 세월이 흘러갑니다. 3개월에서 6개월로 검진 간격이 넓어지고 5년이 지나 10년이 지나갑니다. 아이들은 자라고 남편은 직장을 다니고 그렇게 평범한 가정을 이뤄갔습니다. 암은 어느덧 마음에서도, 몸에서도 지워졌습니다.

그렇게 13년이 조용히 흐르고…

2005년 7월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전이나 재발이 아니라더군요. 암이 새롭게 생긴 것이랍니다. 대장에서 임파 전이, 간에도 전이되어 1cm 2개, 2cm 1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누울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수술대에 다시 누웠습니다. 오후 1시에 들어가 밤 10시에 중환자실로 옮겼습니다. 대장을 50cm 잘라내고, 예방차원에서 전이가 잘되는 자궁과 난소를 자르고, 간까지 수술하기에는 몸이 못 견딜까 싶어 수술 멈추고 남편에게 동의를 구해 다시 간을 반 절제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눈을 뜨고 나니 온 몸에서 물이란 물은 몽땅 빠져나가 바싹 말라버린 기분이더군요.

항암 3차까지 하다 백혈구 수치가 너무 떨어져서 경구용으로 바꿨고, 후에 아직 대동맥절에 암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술도 할 수 없는 위치이고, 그래서 사이버나이프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6년 6월 항암제 경구용 젤로다를 멈췄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며 투병을 하기란 불가능하더군요. 그해 3월, 에덴요양병원 가기로 결심했고 7월에는 뜸 시술을 받을 수 있는 지금의 포천실버타운으로 옮겼습니다.

2007년 현재, 최근 검사결과 수치상으로는 모두 정상이랍니다. 포천에서는 저는 고참입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 저는 보기에도 중환자였고 같이 있던 그분들은 건강해보였는데 이제와 보니 저는 남아있고 그분들은 거의 모두 떠나셨네요. 포천 의사선생님은 들어오는 암환자들에게 제가 뭘 먹고, 어떻게 지내는지 배우라고 하십니다. 글쎄요, 그런데 별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야채 과일 위주로 먹고, 현비잡곡에 흰살 생선 약간, 주위에 지천인 산야초 뜯어다 녹즙 하루 2잔 짜먹고, 뜸뜨고, 저녁이면 커피 관장하고 내일 짜먹을 야채 만져 놓습니다.

책은 처음에는 주위에서 가져다주곤 해서 많이 읽었는데 책마다 주장이 달라 혼란스러워 지금은 안봅니다. 제 나름의 원칙은 필요하다 싶으면 간수치 상황 봐서 이상 없으면 먹습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께 먹는 것에 관해 가타부타 절대 안 물어 봅니다. 그렇다고 비싼 보조제를 주렁주렁 달고 먹지는 않았습니다. 눈이 뜨기 싫을 만큼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 홍삼을 먹으니 한결 나은 경험이 있어 홍삼은 체력 올라가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고 있습니다.

첫 유방암, 다음 대장암 수술, 항암 방사선 치료로 병원을 오갈 때도 저는 혼자 다녔습니다. 힘들면 택시를 탔습니다. 남편이나 아이나 자기 생활이 있고 저만큼은 아니지만 고통과 불편함을 겪는데 환자라고 가족의 생활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유방암 수술로 입원하러 혼자 짐 싸서 들어갔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 해서 할 수 없이 남편에게 와달라고 전화한 적이 있네요. 동생이 들렸다가 항암 맞으러 병원에 같이 다녀오고는 그렇게 힘들어 할 줄 몰랐다며 다음에도 온다기에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수술 끝나고 작년 3월 처음으로 제 몸 상태며 결과를 병원에 확인해 보았습니다. 몸이 안 좋았기에 듣기가 너무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알려하지 않았네요.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 이 책을 보고는 말 그대로 걸어야겠다 싶어 퇴원한 첫 날, 아파트 아래 내려왔다가 발짝도 못 떼고 다시 올라갔어요. 그 다음날은 몇 발 걸었습니다. 다음날은 십여 발짝 떼어놓고 올라오고 그렇게 점점 늘려 한 달 즈음에는 아파트에 있는 산책로 1킬로 300미터를 온전히 쉬지 않고 걸었어요. 그 다음에는 만 보를 작정하고 동네 뒤쪽의 야트막한 군산을 위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5번 정도합니다. 만보기로 재니 5번은 해야 만보가 채워지더군요.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요. 한 방 쓰던 정들었던 언니입니다. 난소암으로 이번 3월에 퇴원하고 4월에 떠났네요. 언니가 짐 정리하고 나가던 날, 저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언니 가는 성지순례도 따라갔어요. 노상 뜸방에서 살다시피 했었는데… 살려고 너무 열심히 애쓰던 모습이 눈물겨웠던 사람인데…

언니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떠오르네요.

병기가 가볍고 깊고를 떠나 힘든 몸이 좋아지는구나 싶었다가 어느 한순간에 스러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제 속으로 이리 여기고 있답니다.

다만, 지금 수명을 연장해서 관리하는 것일 뿐이다 라고요. 다만, 바라는 것은 지금 나름대로 열심히 투병하는 것으로 고통 없이, 힘들지 않게 떠날 수 있으면 그 값으로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소원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커서 대학을 다닙니다. 사람 욕심이란 것이 끝이 없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직장에 들어가 제자리를 잡는 모습까지 보기를 꿈꾸니 말입니다. 뭐, 다를 게 있나요. 암환자라고 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말입니다.

이제 고만 쓰고 가서 뜯어온 나물거리며 녹즙거리 다듬어야겠습니다. 요양생활 한다 해도 저는 종일 쉴 새 없이 바쁘답니다. 마지막으로 모두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가요. 아무도 장담해줄 수 없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주어졌으니 게으름피우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좋은날입니다.



월간암 2007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