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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의 장/쉬어가기

달과6팬스님의 추천시

by 크리에이터 정관진 2008. 10. 8.

 

 

 

 

월훈 -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꽁깍지, 꽁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 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문학사상(1976) 




■ 이해와 감상

박용래의 시의 나타나는 자연은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정서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관념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의 배경도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다분히 시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산골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의 세계가 시인의 애상적 정서와 결합하면서, 또 그것은 향토적 서정으로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도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기엔 있다. 서두부터 독자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동화 속의 세계가 아니라,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우리의 옛 고향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어서 전혀 낯설지 않다. 허방다리를 들어내면 보이는 조그맣고 갱 속 같이 파묻힌 마을, 그 곳에서도 시인의 시선은 홀로 사인 노인의 고독한 삶에 집중된다.

외딴집에 홀로 사는 노인은 깊은 밤에 잠이 깨어 무나 고구마를 깎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리는 데 신경을 모은다. 이러한 정서는 마치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진다'는 시조의 그것과 적절히 보합되는 것이다. 노인의 청각은 짚단과 짚오라기의 서걱거림에서 처마깃 이음 모를 새의 자그마한 움직임에까지 이어지지만, 자기를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문득 통곡한다. 이러한 청각의 집중은 노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더욱 증폭시키 주는 한편,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알려주는 징표로 기능한다.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겨울 귀뚜라미가 벽이 무너지라고 우는 것은 노인의 통곡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벽이 무너지라 우는 귀뚜라미를 겨울 귀뚜라미라고 표현한 데서 동료들과 헤어져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의 신세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노인의 처지가 교묘한 일치를 이룬다. 그러니까 '떼를 지어 웁니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실제 떼를 지어 운다는 것이 아니라, 밤의 정적을 뚫고 울리는 귀뚜라미의  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린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참고 참았던 노인의 내면적 고독과 그리움이 단숨에 터져 나온 통곡과도 같은 것이다. - 김태형 외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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