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터 정관진 제2군단/암환자를 위한 작은정보

스크랩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슬픔을 지우는 것’은 목표가 아니다

크리에이터 정관진 2025. 6. 10. 19:29



[김병수의 우울증 클리닉]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상담에서는 이별의 고통을 자주 목격한다. 젊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어르신을 앞에 두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앉아 있어야만 했고, 연인과 헤어졌지만 사랑을 잃고 싶지 않다며 흘리는 눈물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젊음과 활력이 자기 몸에서 떠나버렸다며 낙담하는 중년의 축 처진 어깨를 바라보기도 했다.

상실을 겪은 뒤 나타나는 마음의 반응을 ‘애도(哀悼)’라고 한다. 애도는 눈물과 통곡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분노하고, 어떤 사람은 멍한 얼굴로 하루를 흘려보낸다. 누구도 슬픔을 똑같이 겪지 않는다. 심리적 문제는 자연스러운 애도의 과정을 제대로 겪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이제는 잊어야지” “다 지난 일이야” 같은 말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바쁘게 일상으로 돌아가 슬픔을 외면하면 마음은 다른 방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한다. 슬픔은 억제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 속에 억눌려 있다가 공허감, 무기력, 집중력 저하, 짜증, 불면, 불안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애도 증후군’이라고 한다. 슬픔이 복잡한 심리적, 생리적 증상으로 전환되는 현상이다. 애도는 자연스러운 회복 과정이지만, 그것이 억제되거나 지연되면 병적인 애도로 나타날 수 있다. 6개월 이상 슬픔이 전혀 완화되지 않거나 상실 당시의 감정과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상 기능이 무너지는 경우다.

애도는 누구에게나 다르게 찾아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삶의 균형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정상 애도와 병적 애도가 구분된다. 정상적인 애도는 비록 괴롭고 힘들어도 조금씩 일상을 되찾는다. 슬픔은 줄지 않더라도 점차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병적인 애도는 삶을 무너뜨린다. 더 이상 웃을 수 없고, 아무것도 의미 없어지고, 살아야 할 이유마저 사라졌다고 느낀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느끼고, 세상과의 연결을 차단하게 된다. 한 달, 세 달, 여섯 달, 일 년이 지나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여전히 울컥 눈물이 나고, 여전히 부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떠난 사람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그와 나눈 마지막 말, 마지막 순간만을 떠올리며 살기도 한다. 고인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거나, 자신이 잘못해서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자책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잘못해서 이별했나?” “나 때문에 사고가 났나” “내가 좀 더 잘했다면 괜찮았을텐데”라며 자신을 탓하면 고통은 커진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달라지 않을 미래를 떠올리며 자기 비난에 빠지면 정상적인 이별의 아픔이 병적인 우울증이 되고 만다.

마음의 자연스러운 생리를 이해해야 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제시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 과정 이론이 있다. 이별하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것이 처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감정 반응이다. 이별했음에도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다 분노가 슬금 슬금 일어난다. “어떻게 나를 떠나갈 수 있어.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고. 이 시기가 지나면서 “그래 어쩔 수 없지”라며 현실과 자기 마음을 타협시킨다.


우울은 현실과의 타협 이후에 찾아온다. ​우울을 통과하고 나면 수용의 시간이다. 수용은 체념이나 포기와 다르다. 이 모든 현실을,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감정을, 그리고 그 결과까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쉽게 충고하지만 이건 혼돈과 고통, 처절하게 찢어진 마음으로 아픔의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얻을 수 있는 상태다.

상실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별 경험은 뇌 깊숙한 곳에 영원히 저장된다. 피부가 깊게 패이면 피는 멈춰도 흉터가 남는 것처럼 상실의 고통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뇌에 남긴다. 잊어지지 않는다고 이상하다 여기면 안 된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상실의 기억이 또다시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시간이 그 깊이를 무디게 만들 수는 있지만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괴롭기는 해도 슬픔에 젖어 있을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우울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재정비하라고 촉구한다. 마음의 바탕이 단단히 다져지기 위해서는 슬픔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마냥 늪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의욕이 떨어져도 돈 벌기 위해 출근해야 하고, 슬퍼도 설거지는 해야 하며, 기운 없어도 가족을 위해 밥을 지어야 한다. 억지로 슬픔을 떼어낼 순 없지만 그렇다고 슬픔이 삶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애도란 상처를 덮는 일이 아니라 그 상처와 함께 존재하는 작업이다. 누군가를 잃은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밥을 먹고, 일을 한다. 그렇게 매일을 살아내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여전히 ‘그 사람의 빈자리’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애도의 목표는 슬픔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슬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출처 :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25/06/05/2025060502483.html
 

출처: 크리에이터 정관진 제1군단 원문보기 글쓴이: 니르바나